유 적

신도비

대흥정

여남강당

여남 유허비각

여남삼층석탑

도항재사

본문

 

당 이부상서 신라 남영의공 신도비 (唐 吏部尙書 新羅 南英䝘公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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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및 건립 의의

이 비석은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시조 영의공(英毅公) 휘(諱) 민(敏)의 행장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묘역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神道)란 ‘신령의 길’ 즉 묘역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의미하며,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위인의 묘역 동남쪽에 세워 그의 생애와 가문의 내력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기념비적 금석문(金石文)이다.

 

2. 시조 영의공의 생애와 사성(賜姓)

비문에는 시조 영의공의 장엄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영의공의 본래 이름은 김충(金忠)으로, 당나라 천보(天寶) 14년(755년,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의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다녀오던 중 거센 태풍을 만나 신라 유도(영덕 축산항)에 기착하게 되었다.

그가 신라에 머물며 귀화할 뜻을 표하자, 신라 경덕왕은 그의 높은 학식과 고결한 인품을 크게 쓰고자 하였다. 이에 그가 남쪽에서 왔다는 뜻을 담아 '남(南)'씨 성을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영양(英陽)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로써 천년을 이어온 영양남씨의 장구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3. 금석문으로서의 역사적 가치

당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라는 최고위 문관 출신으로 신라에 귀화하여 양국의 문물 교류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 시조공의 궤적이 비면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묘역 진입로의 대흥정(大興亭)과 나란히 자리한 이 신도비는 영양남씨의 정체성과 뿌리를 증명하는 핵심 사료이며, 전국에서 모여드는 후손들에게 숭조돈종(崇祖惇宗)의 예법을 일깨우는 중요한 성물(聖物)이다.

 

 

시조 당이부상서신라 남영의공 신도비명 역문(始祖唐吏部尚書新羅南英毅公神道碑銘)

 

문소후인 김황(金榥) 지음

 

세상이 생긴지 오래되었다. 인간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아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태초에는 반드시 위인이 있어 한 氏族(씨족)의 조상이 되나니 인자하고 후덕하여 그 德澤(덕택)이 끝없이 흘러내려 그 근원이 뿌리와 가지가 번성해지고 알려지지 않아도 각기 하나의 거대한 씨족집단을 이루어 모든 세상일에 참여하고 국가의 일마저 주관하게 됨은 또한 천지의 힘을 입어서이다.

 

슬프다. 어찌 구차스럽게 말하겠는냐. 南氏(남씨)가 바로 우리나라의 그와 같은 한 씨족이다.

삼가 살펴 보건데 그 시조는 신라의 英毅公(영의공) 諱(휘) 敏(민)이며 본래 중국 사람으로 이름은 金忠(김충)이니 당나라에 벼슬하여 吏部尙書(이부상서)로 按廉使(안렴사)가 되어 玄宗(현종) 天寶(천보) 14년(서기755년) 을미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신라 땅에 도착하니 때는 景德王(경덕왕) 14년이며 지금으로부터 1205년전이 된다.

 

공이 표박하여 닿은 곳은 有隣(유린盈德) 땅 丑山(축산)이니 후일에 寧海府(영해부)가 되었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영덕군에 속해 있다. 그때는 신라가 당나라의 屬國(속국)인 까닭에 신라왕이 곧 그 사실을 당나라의 황제에게 상주하니 詔書(조서)를 내려 十生九死(십생구사)한 신하를 가히 상례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그 오고 머뭄은 그가 원하는대로 하라고 하니 공이 헤아려보니 당나라의 內政(내정)은 문란하고 북방의 羯胡(갈호:오랑캐)는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돌아가야 할 절조가 없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정치와 문화가 번창하던 때이고 또한 풍속이 아름답고 산천이 맑고 밝으니 가히 땅을 골라서 살만한 곳이라 하고 드디어 이곳에서 살기를 원하니 신라왕이 이에 허락하고 영양현을 식읍으로 내리고 남씨로 賜姓(사성)하니 그 뜻은 당나라 汝南(여남)에서 왔기 때문이다.

 

공의 그때 나이는 40여세였다. 공이 신라에서 어떤 벼슬과 어떤 공적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공이 별세하시자 英毅(영의)라는 시호를 내린 것을 보면 절개와 혜택이 여러 곳에 나왔음으로 내린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高麗朝(고려조) 伏崖(복애) 泛世東(범세동)이 편찬한 人物叢記(인물총기)에 보면 「당나라 황제가 조서로 신라왕에 명하여 곁에 두고 咨詢(자순)토록하여 중국의 문물을 전파하고 정사를 時務(시무) 개진하고 윤리를 밝히도록 하였으며 貞觀政要(정관정요)를 진달하여 반드시 전해들은 바가 있도록 하였다.

 

또 축산지방에 예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吏部洞(이부동)과 通使洞(통사동)은 모두 공이 옛날 살았던 자취로 얻어진 명칭인 즉 공이 일찍 이부상서로서 사신으로 나간 것을 익히 알 수 있고 또한 望鄕臺(망향대)와 望祭壇(망제단)은 공이 고국과 조상의 무덤을 떠난 외로운 나그네로 때때로 오르내리면서 저 먼 하늘 끝을 바라보며 조상 생각에 잠기던 곳이니 이는 곧 공의 천성이 독실하여 조상을 차마 잊지 못함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후손의 世系(세계)가 많이 빠졌음은 상고할 수 없고 중세에 倜(척)이라는 분은 무과에 급제하고 또 翼(익)이라는 분이 있어 英陽君(영양군)으로 襲封(습봉)되었다. 그 뒤에 또 영양으로부터 의령 고성으로 분봉되어 드디어 三貫(삼관)이 되었고 고려를 지나 대한에 이르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있는 분이 많이 배출되어 나아가면 국가에 충성하고 집에 있으면 儒林(유림)의 사표가 되는 이가 수 없이 많으니 그 얼마나 성대한가.

 

공의 묘가 예부터 전하여 오기를 영양현 북쪽 도항구 壬子方向(임자방향)에 있다고 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확실한 증거가 없더니 明陵:肅宗墓(명능:숙종묘) 을묘(1675년)에 처음으로 제단을 산 서쪽 서로 바라보이는 기슭에 설치하고 매년 10월 상순에 墓祭(묘제)모시는 의식과 같이 해마다 변치 않는 격식으로 하고 齋舍(재사)를 그 곁에 세워서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하였다.

 

지난 을미년(1955년)은 공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周甲(주갑)의 해이다. 의령 후손 相喆(상철)이 국내 여러 남씨와 삼관(三貫)이 合譜(합보)할 것을 의논하고 삼년이 걸려 편찬을 순조롭게 마치고 다시 총회를 열고 상철이 종중에 의논 하기를 「우리가 大姓(대성)이면서 시조공의 한 묘를 찾지 못하면 되겠느냐」하고 곧 삽을 잡고 종인들을 고무하여 疑塚의총) 남쪽을 십여척이나 파서 신라때 만들어진 石槨(석곽)을 발견하니 이는 분명 公卿大夫(공경대부)의 무덤으로 이 지방에서는 원래 다른 大人(대인)의 무덤이 없으니 공의 무덤임에 의심이 없다. 전날에도 誌石(지석)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우뢰와 소나기로 일을 마치지 못하였더니 이날에도 마침 소나기가 내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겁을 먹고 주저하거늘 상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나 자신에게 있으니 만약 禍(화)가 있으면 내 몸으로 당한다 하고 이 같은 증험을 얻으니 하늘 또한 맑게 개이고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翕然(흡연)히 말하기를 「모든 일이 때를 기다림이 있어서 신령께서 우리를 도우신 덕택이라」하고 곧 다시 의논 하기를 이 묘가 진실로 우리들의 시조 영의공의 묘이면 비석에 글을 새겨 後生(후생)에게 보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하니 모두가 옳다하고 돌을 깎아서 큰 비석을 만들어 의논을 하니 그 문중의 영양관에 貞燮(정섭)이라는 분이 자진하여 큰 돈을 내어 그 비용을 제공하니 삼관의 모든 종인들이 서로 다투어 출연한 액수 또한 비슷하여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준공 하였다.

 

돌을 다듬어 놓고 重基(중기) 達煥(달환) 台元(태원) 埈(준)이 나를 찾아와서 영의공의 사적과 종인들의 의논한 바를 말하고 돌에 새길 글을 부탁하거늘 생각하여 보니 神道碑(신도비)는 반드시 덕망과 공덕이 세상을 빛낸 사람을 위하여 세우는 것이므로 그 글 또한 그 지위와 衆望(중망)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쓸 수가 없는 것인데 이제 공의 큰 공적훈업이 없어져서 불행하게도 기록에 보전되지 못하였던 것을 나 榥(황)같은 한미하고 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이 부탁을 감당 하겠는가 하고 여러 번 사양 하였으나 제군들의 부탁이 더욱 진지함으로 마지못해 조심스럽게 힘을 다하여 그 글을 초안하여 먼 길을 찾아와서 청하는 입을 막으나 송구하기 그지없다.

 

영양현에 옛날 영의공의 사당이 숙종 신유년(1681년)에 창건하여 순조 경인년(1830년)에 書院(서원)으로 높여 사당 이름은 景德祠(경덕사)라 하였으나 90년전 무진년(1868년)에 서원을 철폐 당하였으나 원안이 아직 남아있고 또한 축산유허비는 金陵(금능) 南公轍(남공철) 相公(상공)이 그 글을 찬 하였고 道項齋(도항재)는 大山(대산) 李先生(이선생)이 찬한 記文(기문)에 공의 유래를 상세히 하였기에 기록함이 자세하여 이 글들을 읽어보고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 役事(역사)에 끝까지 힘쓴 사람은 鎭(진중) 琮洛(종락) 廷逸(정일)이라고 한다.

 

명(銘)을 지어 말하노라.

아름답도다. 그 나라여 天海(천해)의 동쪽에 있도다.

밝은 빛이 통하였고 어진 기운은 융화되었네.

그래서 예부터 군자의 나라라네.

간간히 聖哲(성철)이 머물고저 함을 보였네.

箕子(기자)가 와서 살고 孔子(공자)는 살고 싶어하였네.

대를이어 오면서 歷史(역사)마저 유사하네.

당나라가 끝날 무렵 綱常(강상)은 무너지고 꽃은 앵무새의 嬌態(교태)를 드리우고 매는 제비가 날아간 것을 시기하네.

才德(재덕)있는 선비가 容身(용신) 못함은 당연하다.

그 기미를 보아 먼저 나오니.

만리 뱃길에 사신의 책임이 중하기도 하였다.

安危(안위)와 去就(거취)가 안팎이(內外) 없고 일엽편주 망망대해에 돌아 갈 길은 아득하기만 하여라.

내 한 몸 바람과 파도에 맡겼으니 고개 들고 푸른 하늘만 바라 보네.

푸르고 푸른 하늘이 누가 뜻이 없다할소냐.

바람이 앞뒤로 불어와 나를 樂園(낙원)으로 보내었네.

樂園(낙원)은 어디인고 君子(군자)가 사는 나라로다.

仁賢(인현)이 敎化(교화)해서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아름답네.

우연히 만난 適所(적소) 나의 살 곳 얻었노라.

신라왕은 아름답게 받아주고 天子(천자) 또한 허락했네.

너를 도와 자문하고 文物(문물)을 쫓게 하라. 널리 펴고 독실히 도우니 宗社(종사)에 끼친 공로 모두가 기록되네.

賜姓名(사성명)도 하여 주고 采邑(식읍)도 내리셨네.

여국 동휴척(與國同休城)하니 하늘의 도움일세.

번성한 그 후손이 음덕을 고루 입어 문무관 公卿(공경)되고 어진 선비 俊豪(준호)더라.

盛衰(성쇠)의 때 있어도 일족끼리 단취했네.

누구가 啓基(계기)했나 영의공이시로다.

아름다워라. 영의공은 나라의 보배로다. 나라에서도 잊지 않으니 후손들이 어찌 잊을소냐.

천년 세월 흘렀기에 문헌이 없어졌네. 자취를 찾으려니 슬픔이 더해지고 공사를 무릅쓰고 간절히 찾았었네.

대항의 언덕위에 衣履(의이)가 묻혔다. 그곳을 안다 하나 문헌이 없어졌네.

누군가 찾아내며 누구가 빛낼소냐.

그 공적이 보이랴.

밝으신 英靈(영령)께서 옛날과 같이 빛이 나니 나라를 도우시고 후손에게도 은총을 주네.

사적 비록 희미하나 禮(예)로 모심 옛날 같네.

사적을 밝혀내어 사(詞)를 지어 빛을 내니 일월산은 무너지지 않고(日山不蹇) 바다물은 마르지 않네(滄海不渴).

공의 유덕 널리 펴니 유광(流光)이 끝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