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씨의 유래
남씨(南氏)의 유래(由來)
시조 영의공 이야기
바다를 건너온 한 중국 사신
천이백여 년 전, 한 척의 배가 동해의 거센 바람에 떠밀려 신라 땅 축산(丑山) 앞바다에 닿았다.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천보(天寶) 14년, 서기로 755년 가을의 일이다. 그 배에는 당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한 인물이 타고 있었다. 본래의 성은 김(金), 이름은 충(忠), 자란 고향은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그때 그의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안렴사(按廉使)를 겸한 자리였으니, 조정에서 덕망과 명망이 그에 견줄 사람이 드물었다.
우리 남씨가 시조로 받드는 영의공(英毅公)이 바로 그분이다. 그때 공의 나이는 마흔 남짓이었다.
머무시기로 한 까닭
신라 왕은 표류해 온 당나라 사신의 일을 곧바로 황제에게 알렸다. 당시 신라는 당과 책봉 관계에 있었기에 마땅한 도리였다. 당 현종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신하를 다시 예전처럼 부를 수 없으니, 본인이 머물고자 하는 곳에 살게 하라” 하였다.
공이 그때의 정세를 가만히 살펴보니, 당나라는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황제가 촉(蜀) 땅으로 피난할 지경이었고, 양귀비와 양국충의 어지러운 정사로 사대부들이 벼슬길에 나서기를 꺼리던 시절이었다. 반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로 정치가 안정되고 문물이 융성하며, 산천이 맑고 풍속이 두터운 땅이었다. 일찍이 공자께서 “동이(東夷)에 살고 싶다” 하신 그 동방의 군자국이 바로 이곳이었다.
공은 마침내 신라에 뼈를 묻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신라 경덕왕은 이를 기뻐하여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공이 당나라 남쪽 땅 여남에서 왔다 하여 ‘남(南)’ 한 글자를 성으로 내렸다. 이름도 충(忠)에서 민(敏)으로 고쳤으며, 훗날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 그 절의와 덕망을 기려 영의(英毅)라는 시호를 올렸다. 우리 남씨가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순간이다.
축산도에 남은 자취
영덕 축산면, 옛 이름으로 유린(有隣) 땅 축산도. 이곳에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조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마을 안에 이부동(吏部洞)과 통사동(通使洞)이라는 옛 지명이 그대로 전해 내려온다. 공이 당나라에서 지내신 이부상서와 통사(通使, 사신)의 벼슬을 기리어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망향대(望鄕臺)가 있다. 공이 만리 타국에 머무는 처지에도 하루도 고국을 잊지 못하여 산에 올라 멀리 중국의 산천을바라보며 회포를 달래시던 곳이다. 그 곁에 망제단(望祭壇)이 있으니, 절기마다 부모의 묘소를 향해 망제(望祭)를 올리며 만리 밖 조상을 흠모하시던 자리이다. 일광대(日光臺)와 월영대(月影臺)는 좋은 날과 달 밝은 밤에 마음을 다스리시던 곳이며, 절부총(節斧塚)은 사신의 신표인 절월(節鉞)을 묻으셨다고 전해지는 자취이다.
이 모든 자취가 사서(史書)에 일일이 기록되지는 못하였으나, 천여 년을 두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니 시조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의 한 자락을 엿보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세 갈래로 나뉜 본관
공이 신라에 머무신 뒤로 후손은 대를 이어 번성하였다.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동안 휘 익(翼)이라는 분이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해지고, 그 뒤 또다시 의령(宜寧)과 고성(固城)으로 분봉(分封)되어 마침내 영양·의령·고성의 세 본관[三貫]이 이루어졌다. 본관은 셋으로 갈라졌으나 그 뿌리는 하나이니, 옛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비록 갈라졌어도 같은 주(周)나라에서 나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 본관에서 덕업(德業)과 문장으로 이름난 선비, 충효와 절의로 빛난 공경대부가 대를 이어 끊임없이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명문대족을 이루었으니, 이는 모두 시조께서 남기신 깊은 덕택이 후손에게 미친 은혜라 하겠다.
천 년만에 찾은 묘소
공의 묘소는 일찍이 영양 일월산(日月山) 부용봉(芙蓉峰) 아래 도항구(道項口) 임원(壬原)에 있다고 전해 왔으나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정확한 자리를 가늠할 길이 없었다. 숙종 을묘년(1675년)에 이르러 후손 금일(錦逸)이 묘소 서쪽 기슭에 단을 쌓아 매년 시월 초에 제향을 모셨고, 곁에 재사(齋舍)를 세워 제사 공간으로 삼았으나 본 묘소만은 끝내 확인하지 못하였다.
천년의 한이 풀린 것은 1958년 무술년 봄이다. 그해는 마침 삼파(三派) 대동보(大同譜)가완성된 뜻깊은 해였다. 의령파 후손 상철(相喆)이 종친들과 뜻을 모아 의총(疑塚) 남쪽을 파 내려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가랑비가 쏟아져 사람들이 망설였다. 그러나 상철은 “허물이 있다면 내 한 몸으로 받겠다” 하고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곧 하늘이 맑게 개었고, 며칠을 더 파 내려가자 마침내 신라 시대의 큰 석곽(石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지역에 다른 왕공(王公)의 장지가 있다는 기록이 없었으니, 시조의 진택(眞宅)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천년을 두고 풀지 못하던 일이 하루아침에 풀렸으니, 이는 조상께서 굽어보신 뜻이요 자손에게 내리신 큰 행운이라 할 만하다. 이 해에 밀직공파 후손 정섭(貞燮)이 큰 비용을 내고 모든 종친이 정성을 보태어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은 의령 후손 상철이 짓고 썼으며, 신도비명은 당대의 큰 학자였던 문소(聞韶) 김황(金榥) 선생이 지었다. 일찍이 정조 때의 대제학 휘 공철(公轍) 선조께서 지으신 영해 축산의 유허비음기명과 더불어, 시조의 자취를 후세에 길이 전하는 세 편의 금석문이 이로써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천 년을 이어 온 뜻
당나라가 무너진 뒤로 중국 땅은 송(宋)·원(元)·명(明)·청(淸)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중국의 사대부들은 머리를 깎거나 옷깃을 돌려 입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남씨만은 동방의 한 모퉁이에 살면서 시서(詩書)를 외우고 예악(禮樂)을 논하며 의관(衣冠)을 한 번도 고치지 않았으니, 대제학 공철 선조의 말씀처럼 이 모두가 영의공께서 남기신 깊고 큰 유택(遺澤)이다.
천이백여 년 전, 한 척의 배가 동해 바람에 떠밀려 닿은 그 자리에서 우리 남씨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영해 동녘 푸른 죽도(竹島)에는 시조께서 처음 오시던 날의 뱃노래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산천은 변해도 그 뿌리는 끄떡없고, 세월이 흘러도 그 덕택은 마르지 않는다. 일월산이 우뚝하고 동해가 마르지 않는 한, 시조 영의공의 유덕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龍丘堂】
※ 본 글은 대제학 휘 공철(公轍)의 유허비음기명, 문소(聞韶) 김황(金榥) 선생의 신도비명, 의령 후손 상철(相喆)의 묘비명을 토대로 정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