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의 발전
영양남씨의 기원과 발전
서언(序言)
가문(家門)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단순히 옛 자취를 더듬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정체성의 탐구이자, 한민족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수백 수천 년을 이어 온 성씨와 본관은 한 혈맥의 상징인 동시에,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지키며 무엇을 후세에 남겼는지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영양남씨는 신라 중기 경덕왕 시대에 그 연원을 두고, 고려와 조선의 천 년 세월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한국 사회의 정신적·문화적 토대를 가꾸어 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이 글은 영양남씨의 비조(鼻祖)이신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도래(渡來)에서부터, 중시조 중대광공(重大匡公) 남홍보(南洪輔)를 거쳐, 본류인 중대광공파가 여섯 종파(宗派)로 분화하기까지의 역정(歷程)을 차례로 짚어 보고자 한다.
1. 본관(本貫) 영양(英陽)의 의미
한국 사회에서 성씨와 본관은 단순한 이름의 표지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후손에게 면면히 이어 온 정신과 가풍의 상징이다. 본관이란 한 가문이 처음 뿌리를 내린 발상지(發祥地)를 가리키는 말로, 그 지명에는 시조가 받은 식읍(食邑)의 자취가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영양남씨의 본관 영양(英陽)은 곧 신라 조정이 시조 남민에게 내린 식읍의 이름이다. 천 삼백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후손들은 영양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으나, '영양' 두 글자는 가문의 정신적 고향으로 남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가문의 역사가 한반도 동남부의 한 고을과 이처럼 깊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영양남씨가 단지 혈연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의 문화와 풍토와 한 몸을 이루어 왔음을 보여 준다.
2. 시조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
(1) 김충(金忠)에서 남민(南敏)으로 - 도래(渡來)와 사성(賜姓)
영양남씨를 비롯한 모든 남씨(南氏)가 한 분 조상으로 받드는 시조 남민의 원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충(忠)이었다. 그는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당 현종(玄宗)때 이부상서(吏部尙書)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역임한 고관(高官)이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라서는 안렴사(按廉使)였다는 설도 있으나, 그가 당대(當代)에 상당한 관품(官品)에 올랐던 인물이었다는 점은 여러 자료가 한결같이 증언한다.그가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4년, 곧 서기 755년의 일이다. 그해 당나라 사신의 직임을 띠고 일본으로 갔다 오는 귀국길 망망대해에서 거센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마침내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죽도(竹島) 해안에 닿았다. 풍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표류의 사연은 동아시아 고대 문헌에서 종종 보이는 모티프이지만, 한 사람의 표착(漂着)이 한 가문의 천 년 역사가 비롯되는 시발점이 된 사례는 흔치 않다.
신라에 머무르게 된 김충에게 경덕왕은 그가 중국의 여남(汝南) 출신임을 들어, '남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은 민(敏)으로 고쳐 주었다. 이는 단순한 사성(賜姓)을 넘어, 한 이방인이 신라 사회의 공식적인 일원으로 받아들여 졌음을 천명한 상징적 의례였다. 동시에 그것은 한반도에 새로운 성씨 하나가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남민은 영의공(英毅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영(英)'은 빼어남을, '의(毅)'는 굳셈을 뜻하니, 두 글자에 담긴 무게가 그의 됨됨이를 가늠하게 한다. 조정은 그에게 식읍으로 영양현(英陽縣)을 내렸다. 식읍이란 국가에 큰 공이 있거나 특별한 지위에 있는 인물에게 일정한 고을의 조세 수취권을 부여하는 제도로, 이는 남민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단순한 귀화인의 대접을 넘어선 예우를 받았음을 보여 준다. 이 영양현이 곧 오늘날 영양남씨 본관의 지리적 근간이 되었고, 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문의 정체성과 깊이 결합된 정신적 고향으로 남아 있다.
경상북도 영양군에는 시조 남민을 봉향하기 위한 여남서원(汝南書院)의 강당(講堂)인 여남강당(汝南講堂)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시조의 유지(遺志)를 기리고 있으며, 영양읍 동부리(東部里)에는 영의공의 묘역이 자리하여 매년 가을이면 전국의 남씨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향제(秋享祭)를 봉행한다. 천 삼백여 년의 풍상을 건너 한 분 조상께 함께 잔을 올리는 이 의식은, 영양남씨가 단순한 혈연의 끈을 넘어 정신적 공동체로 살아 있음을 해마다 새로이 확인하는 자리이다.
(2) 김석중(金錫中)과 영양김씨(英陽金氏)
남민의 직계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시조와 함께 여정에 올라 신라 땅에 정착한 그의 맏아들 김석중(金錫中)의 이야기다. 김석중은 부친이 남씨 성을 하사 받기 이전에 이미 태어나 있었던 까닭에 원래 중국에서의 성(性)인 김씨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그 후손들이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시조로 그를 받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작은 일화는 두 가지를 일러 준다. 하나는 남씨로의 사성이 가족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가장(家長)인 남민 당대(當代)에 한정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양남씨와 영양김씨가 한 분 시조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라는 점이다. 천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두 가문이 서로의 뿌리를 잊지 않고 우의(友誼)를 이어 가는 것은, 이러한 깊은 혈연적 연원에 기인한다.
3.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정통(正統)
시조 남민의 후손들이 여러 대를 거치며 번성하는 동안, 가문은 자연스럽게 여러 본관으로 갈라지는 분관(分貫)의 과정을 거쳤다. 오늘날 남씨의 주요 본관으로는 영양(英陽)·의령(宜寧)·고성(固城) 세 본관이 일컬어지며, 이들은 본관은 다르되 모두 시조 영의공 남민을 한 분 조상으로 받드는 동근(同根)의 가문이다.
세 본관이 언제 누구로부터 갈라져 나왔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계유 대동보(癸酉大同譜) 편찬 당시의 검토에서, 세대 수의 차이나 기록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세 본관 모두 남홍보(南洪輔)·남군보(南君甫)·남광보(南匡甫) 3형제를 분관의 기점으로 본다는 데에는 공통 인식이 자리 잡았다. 곧 장남 남홍보는 선조의 본관 영양을 그대로 이어 영양남씨의 일세조(一世祖)가 되고, 차남 남군보는 의령(宜寧)으로 분관하여 의령남씨의 비조가 되었으며, 삼남 남광보는 고성(固城)으로 분관하여 고성남씨의 비조가 되었다.
영양남씨는 장남 남홍보를 가문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중시조(中始祖) 또는 일세조(一世祖)로 받든다. 중시조란 시조 이후 한때 가세(家勢)가 기울거나 흩어졌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특정 본관을 중심으로 가문을 크게 중흥시킨 조상을 일컫는 말이다. 남홍보는 고려조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종일품(從一品) 중대광의 품계에 올랐다고 전하며, 그의 사회적 지위는 곧 영양남씨, 그중에서도 그의 직계인 중대광공파(重大匡公派)가 명문가로 발돋움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영양남씨는 중시조 남홍보의 제단(祭壇)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竹邊面) 화방묘역(花坊墓域)에 마련하여 봉향하고 있다. 인근에는 강학(講學)과 추모(追慕)의 공간인 화산강당(花山講堂)과 상현사(尙賢祠)가 함께 자리하여, 후손들이 모여 글을 읽고 조상의 덕을 기리는 장소로 오래도록 기능해 왔다. 산이 깊고 물이 맑은 이 일대는 영양남씨가 정신적본향(本鄕)으로 삼는 또 하나의 성지(聖地)이다.
4. 중대광공파의 발전과 육대종파(六大宗派)의 분화(分派)
영양남씨는 시조 영의공과 중시조 중대광공 이후 고려와 조선 양조(兩朝)에 걸쳐 꾸준히 가세를 확장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특히 중시조 남홍보를 관조(貫祖)로 하는 중대광공파는 영양남씨의 본류(本流)로서 가문의 번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중대광공은 고려조 종일품의 중대광이라는 높은 품계를 누렸고, 그의 후손들은 영양을 중심으로 가풍(家風)을 이어 가며 학문과 절의(節義)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다만 안동(安東)을 기반으로 일가를 이룬 영양남씨 안동파, 곧 밀직공파(密直公派)와는 그 계통이 엄연히 구분되며, 양 계통의 세계(世系) 귀속 문제는 가문내 오랜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영양남씨 중대광공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종파(宗派)로 갈라져 발전했는데, 세보(世譜)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주요 여섯 종파, 곧 육대종파는 다음과 같다.
◎ 녹사공파(錄事公派)
파조(派祖)는 남계문(南啓文)이다. 그는 공민왕조에 영경전녹사(永慶殿錄事)를 지낸 남승경(南承慶)의 손자로, 후손들은 주로 경상북도 울진군 일대에 세거(世居)하며 학문과 향풍(鄕風)을 지켜 왔다.
◎ 만호공파(萬戶公派)
파조는 세종조에 만호(萬戶)를 지낸 남호(南顥)이다. 이 파 역시 울진을 중심 세거지로 삼아 번성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풍수·예언가로 이름 높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가 바로 이 만호공파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학문과 일화는 오늘까지도 영양남씨의 명성을 빛내는 자취로 회자된다.
◎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는 남이(南頤)로, 세종조에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역임하였다. 후손들은 경상북도 울진군·경주시·봉화군 등지에 흩어져 거주하며, 각 지역에서 가풍을 이어 왔다.
◎ 반송공파(攀松公派)
파조는 남영(南領)이며, 경상북도 울진군과 울릉군에 주로 세거하였다. 동해의 푸른 파도와 솔숲을 곁에 두고 살아온 후손들의 정신은, 파명(派名)의 '반송(攀松)' 두 글자에 그 일면이 비친다.
◎ 송정공파(松亭公派)
파조는 남수(南須)로, 세종조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송정공파는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경상북도 울진·경주·영덕·예천·영양·문경·청송 일원은 물론 대구광역시와 강원도 삼척 등 광활한 지역에 분포한다. 영양남씨 중대광공파 가운데서도 인적·지역적 외연이 가장 넓은 종파의 하나로 평가된다.
◎ 수사공파(水使公派)
파조는 남희(南禧)이다. 그는 태종조에 대호군(大護軍) 및 강원도 조전첨절제사 (江原道 助戰僉節制使)를 지낸 남득량(南得良)의 맏아들로, 후손들은 경상북도 경주시와 강원도 강릉시·고성군 등 동해안 일원에 세거하며 무반(武班)의 기풍을 이어 왔다.
결어(結語)
이처럼 영양남씨는 여러 종파와 지파(支派)로 분화하면서도 각 지역에서 가문의 명맥을 굳건히 잇고, 학문과 덕행을 쌓아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 왔다.
천 삼백여 년 전 동해 바다의 한 척 배에서 시작된 이 혈맥은 오늘날 수많은 후예의 핏줄을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조상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 속에서 빛나는 가풍을 이루어 갈 것이다.【龍丘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