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의 발전

영양남씨의 발전

영양남씨의 기원과 발전

- 신라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삼백여 년 가문의 발자취 -

 

1. 유구한 역사

nam1_1_3a.jpg한국 사회에서 가문의 역사와 그 뿌리를 탐구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역사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각 성씨와 본관은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이어진 혈연 공동체의 상징이자, 한민족 역사의 다채로운 면면을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양남씨는 신라시대에 그 연원을 둔 유서 깊은 가문으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해 왔다. 이 글에서는 영양남씨의 시조인 영의공 남민의 생애와 남씨 성의 기원, 영양남씨의 본류인 중대광공파(重大匡公派)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의 발전상, 그리고 가문이 남긴 인물과 유적, 전국 각지의 집성촌과 오늘의 모습까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시조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

■ 시조의 기원

영양남씨를 비롯한 모든 남씨의 시조로 추앙받는 남민의 본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충(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이부상서 겸 형주자사를 역임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기록에 따라서는 당나라 안렴사(按廉使)였다고도 한다.

 

남민이 한반도로 오게 된 것은 신라 경덕왕 14년(서기 755년)의 일이다. 당시 당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거센 태풍을 만나 표류하였고,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죽도 해안에 이르렀다. 신라에 정착하게 된 김충에게 경덕왕은 그가 중국의 여남(汝南)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남쪽에서 왔다’는 의미로 남(南)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주었다. 이는 단순한 이름의 변화를 넘어 그가 신라 사회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며, 그의 후손들이 새로운 성씨를 가진 독자적인 가문을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

 

이후 남민은 영의공(英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식읍(食邑)으로 영양현(英陽縣)을 하사받았다. 식읍은 국가에 공로가 있거나 특별한 지위에 있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토지로, 이는 남민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 영양현이 바로 오늘날 영양남씨 본관의 지리적 근간이 되었고, 남씨 가문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경상북도 영양군에는 시조 남민을 봉향하기 위한 여남서원(汝南書院)의 강당인 여남강당이 남아 있어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다. 현재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에 영의공의 묘역이 있으며, 매년 가을 전국의 남씨들이 모여 추향제(秋享祭)를 봉행한다.

 

■ 영양김씨(英陽金氏)

남민의 직계 후손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의 첫째 아들 김석중의 이야기다. 김석중은 남민이 남씨 성을 받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본래의 성인 김씨를 그대로 사용하여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남씨 성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을 가늠하게 하고, 영양남씨와 영양김씨가 시조를 같이하는 형제 가문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러한 관계는 가문의 초기 형성과 인접 혈족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깊이를 더한다.

 

 

3. 영양남씨의 정통성

nam1_1_3b.jpg시조 남민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번창하면서 자연스럽게 본관이 나뉘는 분관(分貫)이 이루어졌다. 현재 남씨의 주요 본관으로는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등이 있으며, 남민을 공동 시조로 받든다.

 

남씨의 주요 본관이 언제, 누구로부터 갈라져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나 계유 대동보(癸酉大同譜) 편찬 당시의 세대 차이나 기록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세 본관은 공히 남홍보(南洪輔)·남군보(南君甫)·남광보(南匡甫) 3형제를 각 본관의 중시조가 갈라지는 기점으로 본다. 장남 남홍보는 선조의 대를 이어 영양을 본관으로 삼았고, 차남 남군보는 의령남씨, 삼남 남광보는 고성남씨로 분관하여 각각 본관의 1세조가 되었다.

 

이러한 세대 기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양남씨는 남홍보를 가문의 정통을 계승한 중시조(中始祖) 또는 1세조(一世祖)로 받든다. 중시조는 시조 이후 가세가 기울었거나 흩어졌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특정 본관을 중심으로 가문을 크게 중흥시킨 조상을 일컫는 말로, 남홍보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그는 고려시대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중대광(重大匡) 등의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 지위는 영양남씨, 특히 그의 직계 후손인 중대광공파가 명문가로 발돋움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영양남씨는 남홍보를 중시조로 모시며, 그의 제단이 화산강당·상현사(尙賢祠) 등이 있는 울진 죽변면 화방묘역에 마련되어 있다.

 

 

4. 중대광공파(重大匡公派)의 발전과 분파

영양남씨는 시조 영의공과 중시조 중대광공 남홍보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꾸준히 가세를 확장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발전해 왔다. 특히 중시조 남홍보를 관조(貫祖)로 하는 중대광공파는 영양남씨의 본류로서 가문의 번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대광공은 고려시대에 중대광이라는 높은 품계를 지녔으며, 그의 후손들은 영양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가풍을 이어왔다. 이는 중시조 밀직공 군보의 후예로서 안동에 세거(世居)한 영양남씨 밀직공파(密直公派, 안동파)와는 세계(世系)와 분파를 달리하는, 영양남씨의 종통(宗統)이자 본류이다.

 

■ 6대 종파

nam1_1_3c.jpg1세조 중대광공으로부터 2세조 휘 겸(謙), 3세조 휘 숙지(淑止), 4세조 휘 지탁(之卓), 5세조 휘 혁(奕)·휘 삼기(三奇)로 이어지고, 6세조 대에 이르러 휘 승경(承敬)은 녹사공파의 상계(上系)가, 휘 승고(承顧)는 만호·현감·반송·송정 네 파의 상계가, 휘 봉우(鳳羽)는 수사공파의 상계가 되었다. 특히 7세조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영번(永蕃)의 네 아들 호(顥)·이(頤)·영(領)·수(須)가 각각 만호·현감·반송·송정 4파의 파조가 되었으니, 이 네 파는 형제의 갈래인 셈이다. 영양남씨의 6대 종파는 다음과 같다.

 

◎ 록사공파(錄事公派)

파조는 남계문(南啓文)으로, 공민왕 때 영경전녹사(令慶殿錄事)를 지낸 남승경의 손자이다. 주로 경상북도 울진군에 세거하였다.

◎ 만호공파(萬戶公派)

파조는 남호(南顥)로, 세종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이 파는 울진군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조선 중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예언가인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가 이 파의 후손이다.

◎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는 남이(南頤)로, 세종 때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역임하였다. 울진군·경주시·봉화군 등지에 후손들이 거주하였다.

◎ 반송공파(攀松公派)

파조는 남영(南領)이며, 경상북도 울진군과 울릉군에 주로 세거하였다.

◎ 송정공파(松亭公派)

파조는 남수(南須)로, 세종 때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이 파는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울진·경주·영덕·예천·영양·문경·청송 및 대구광역시, 강원도 삼척 등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대구 입석(立石)에 자리한 석호공파(石湖公派) 또한 송정공파에서 갈라져 나온 큰 지파이다.

◎ 수사공파(水使公派)

파조는 남희(南禧)로, 태종 때 대호군 및 강원도조전첨절제사를 지낸 남득량의 맏아들이다. 경주시와 강원도 강릉시·고성군 등지에 세거하였다.

이처럼 영양남씨는 여러 종파와 지파로 분화하며 각 지역에서 가문의 명맥을 잇고 학문과 덕행을 쌓아 그 위상을 높이는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왔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러한 발전을 인물·유적·집성촌의 세 갈래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5. 학문과 절의(節義)로 빛난 인물들

가문의 발전은 곧 인물의 배출로 증명된다. 영양남씨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문과 절의, 충효를 겸비한 인물을 잇따라 배출하며 영남 사림(士林)의 한 축을 이루었다.

 

■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 만호공파, 1509~1571

nam1_1_3d.jpg울진에서 태어난 남사고는 유학에서 출발하여 중년에 이르러 역학(易學)·천문(天文)·지리(地理)에 두루 통달하였고, 선조 때에는 천문교수(天文敎授)를 지내며 국가 기관에서도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송나라의 우주론자 소옹(邵雍)에 견주어 ‘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 일컬었으며, 『격암유록(格庵遺錄)』·『남격암십승지론』 등의 저술이 전한다. 그는 중시조 남홍보를 모신 화방묘역 상현사에 배향되어 가문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된다.

 

■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 - 송정공파 파조, 1395~1477

문과에 올라 사헌부 감찰과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냈으며, 백성을 어루만지는 선정으로 ‘조선 최고의 수령’이라는 평을 얻었다.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해로 낙향한 뒤 30여 년간 학문에 몰두하다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울진에서 영해 인량리로 이거한 입향조로서, 그 후손이 가장 크게 번성하여 송정공파를 영양남씨의 대표적 종파로 성장시켰다.

 

■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 - 1572~161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충신이자,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를 섬긴 효자였다. 의병 활동으로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충절과 효행, 학문은 후손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영덕 영해의 난고종택과 ‘영산가학(英山家學)’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 예연공(禮淵公) 남석로(南碩老) - 1726~1771

nam1_1_3e.jpg대구 입석(立石)에 뿌리내린 석호공파의 입향조 석호공(石湖公)의 현손(玄孫)으로, 효행으로 이름 높은 용암(龍菴) 남명신(南命新)의 아들이다. 영남의 큰선비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과 만경현령(萬頃縣令, 현 김제)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쳤다. 1762년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나던 날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두문불출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 향년 46세로 별세하였다. 정조가 즉위 초에 가장 먼저 그를 찾았으나 이미 고인이 된 뒤여서 크게 애석히 여겼으며, 그의 문학과 충절은 세 조정에 걸쳐 칭송되었다. 만경현령 시절 남긴 『보순사첩(報巡使帖)』은 청나라와의 교역을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 외교·무역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청백(淸白)과 구휼로 백성을 보살핀 목민관이자 지극한 효자로 이름났다. 후손들은 부친 용암공과 그의 유문(遺文)을 한데 모아 『석문세고(石門世稿)』로 간행하고, 효행을 기려 정효각(旌孝閣)을 세워 그 정신을 오늘에 전한다. 예연공은 대구 입석에 뿌리내린 석호공파의 학덕(學德)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된다.

 

■ 무실재(務實齋) 남진영(南軫永) - 1889~1972

울진 정림(亭林) 출신으로, 중대광공파의 본류인 중랑장공(中郞將公) 문중에서 난 조선 말기·근대의 성리학자이다.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어, 당대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대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그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간재는 그의 자질을 깊이 아껴 ‘무실재(務實齋)’라는 호를 지어 주었는데, 이는 성리학의 참된 종자(種子)를 힘써 보존하고 이어 가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는 주자(朱子)의 심성론(心性論)을 깊이 천착하여 한주(寒洲) 이진상의 심학(心學)을 비판하는 등 독자적 학설을 세웠으며, 그 성과를 『무실재사고(務實齋私稿)』 등 방대한 문집으로 남겨 ‘울진의 마지막 유학자’로 일컬어진다. 또한 그의 친동생 남준영을 비롯하여 한 집안에서 여러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어, 학문과 우국(憂國)의 정신이 함께 이어진 가풍을 보여 준다.

 

 

6. 종택과 유적에 깃든 가문의 자취

인물이 남긴 정신은 건축과 기록으로 오늘에 전한다. 영양남씨의 종택과 서원, 재실(齋舍)은 가문의 발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 난고종택(영덕 영해, 국가민속문화재 제271호)

nam1_1_3f.jpg난고 남경훈의 종가로, 맏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佶)이 1624년 창건하고 증손 남노명(南魯命)이 사랑채 ‘만취헌(晩翠軒)’을 짓는 등 여러 대에 걸쳐 완성하였다. 정침·만취헌·불천위 사당

·별묘·난고정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손들의 문집을 350여 년간 한 대도 빠짐없이 모은 ‘영산가학’(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제648호)을 전하는 학문의 산실이다.

 

■ 괴시마을 고택군(영덕 영해, 국가민속문화재 제253호)

입향조 남붕(南鵬) 이래 600여 년을 이어온 영양남씨 집성촌으로, 괴시파 종택을 비롯해 해촌고택·물소와고택·서당고택 등 30여 채의 전통 가옥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태어난 외가 마을로도 이름 높다.

 

■ 화재(花齋)·육영루(毓英樓)(영덕 축산)

송정공 남수의 덕을 기려 1774년 영덕 축산면 칠성리 재궁마을에 세운 재실과 강당이다. 화재는 봉사(奉祀)를 위한 재실, 육영루는 후학을 가르치던 누각형 강당으로, 2002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바로 위쪽에 송정공의 묘역이 자리한다.

 

■ 신암공 종택·처인당 등(영양·영덕)

영양 일월면 섬촌리의 신암공(愼庵公) 종택은 무과에 올라 군위현감을 지낸 신암공 남손(南蓀, 1415~1488)을 파조로 하는 종택이며, 영덕 창수면 인량리의 처인당(處仁堂)은 송정공 남수가 터를 잡은 자리에 후손 용암 남필대가 세운 별채로 임진왜란 의병의 산실이 되었다.

 

■ 격암 남사고 유적지(울진 근남)

울진 근남면 수곡리의 격암 유적지는 생가터와 자동서원(紫洞書院)·치격사·격암기념관을 갖춘 공원형 유적으로 조성되어 남사고의 학문을 기린다.

 

 

7. 전국에 뿌리내린 집성촌

영양남씨는 본관인 영양을 비롯해 동해안과 영남 내륙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왔다. 대표적인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 영덕: 영해 괴시마을과 원구마을(난고종택), 창수면 인량리(송정공 입향지)를 중심으로 한 송정공파의 본향이다.

영양: 일월면 섬촌리(신암공 종택), 석보면 일대 등 본관 고을 곳곳에 세거지가 분포하며, 항일 독립운동의 인맥이 두텁다.

울진: 죽변면 화방묘역(중시조·중랑장공)과 근남면(격암유적)을 중심으로 록사, 만호, 현감, 반송공파가 세거하였다.

청송: 송정공파의 갈래인 운강공파(雲岡公派)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종회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경주·강릉·고성: 수사공파의 주요 세거지로, 동해안을 따라 가문의 영역을 넓혔다.

대구: 입석(立石)을 중심으로 한 석호공파의 집성촌이 자리하며, 도심 속에서 종중 회관과 종중 묘원(석호원)을 갖추고 활발히 종무를 펴고 있다.

 

이처럼 전국에 걸친 집성촌은 영양남씨가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동해안과 영남 전역으로 뻗어 나가며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8. 오늘의 영양남씨, 그리고 내일

영양남씨의 발전은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후손들은 정·관계와 학계, 법조계, 재계,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며 가문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묵묵히 제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수많은 종친의 헌신이 모여, 영양남씨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서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문중 차원의 노력 또한 끊이지 않는다.

 

1978년 발족한 영양남씨 대종회는 시조 영의공과 역대 선조에 대한 향사를 정성껏 받들고, 흩어진 종친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어 왔다. 또한 세보편찬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족보 편찬과 기록 보존 사업은 종이 족보를 넘어 역사·문화·유적을 아우르는 종합 디지털 아카이브를 지향하며, 가문의 정통성과 자긍심을 다음 세대로 잇는 토대가 되고 있다.

 

신라의 해안에 표박한 한 인물에서 비롯된 영양남씨는, 중시조 중대광공을 거쳐 여섯 종파로 갈라지며 천삼백여 년의 세월 동안 학문과 절의, 충효의 가풍을 이어 왔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지키고 가꾸며 시대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오늘을 사는 후손들의 몫이다. 영양남씨의 빛나는 역사가 앞으로도 길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