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조 중랑장공 묘역

7세조 중랑장공 묘역

중랑장공 묘갈명(中郎將公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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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영번(永蕃)이다. 시조인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이 당나라의 안사로 일본에 갔다가 신라의 유린지(지금의 영덕군 축산)에 표박(漂泊)하였다. 신라 왕이 천자에게 그 사실을 아뢰고 남씨 성을 내려 영양현의 방백으로 삼으니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관향을 삼았다.

 

고려조에 와서 휘 홍보(洪輔)가 계셨으니 벼슬이 중대광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아들 휘 겸(謙)은 위위주부령동정(衛慰注簿令同正)이요, 손자 휘 숙손(淑孫)은 급제하여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이 되셨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지략(之卓)이니 과거에 급제하셨고, 조(祖)의 휘는 혁(奕)이니 진사로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이요, 고(考)의 휘는 승고(承顧)로 중정대부부시령판사(中正大大宗簿侍令判事)이시다.

 

공은 고려 말에 태어나시어 국운이 쇠진할 조짐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명예와 절조를 숭상하고 집안을 보존하여,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유속(流俗)을 깨우치셨다.

 

공이 이때에 내시원(內侍院)에서 보호위보승중랑장(補虎衛保勝中郎將)으로 계시다가 일조(一朝)에 호연(浩然)의 뜻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동해의 울진으로 들어가셨다. 은거하여 끝내 출사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시니 홍희(洪熙)을사 1425년10월이다. 군(郡)의 북쪽 화방(花坊) 송가부해(誦歌負亥)의 동산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강릉 최씨로 부원군 안소(安沼)의 아들인 판서 유의의 따님이시며 묘는 합장하였다.

 

공은 네 아들을 두셨으니 장남 호(顥)는 장군 만호(萬戶)로, 세종조에 울릉도를 토벌함에 적들은 그 땅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이 사실이 여지(輿誌)에 실려 있고, 둘째 이(頤)는 정읍현감(井邑縣監)이었으며, 셋째 영(領)은 진사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넷째 수(須)는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어사(司憲府監察御使)와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내다가 단종이 손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일찍 낙향을 하였다.

한 따님은 군수 박휘(朴暉)에게 출가하였다.

 

호(顥)는 두 아들을 두셨으니 구경(九經)과 구주(九疇)인데 구주의 손자 사고(師古)는 이학(理學)에 정통하여 세상사람들이, 해동강절(海東康節:宋의 邵雍)이라 하였다.

 

이(頤)는 세 아들을 두셨으니 중지(仲正)는 충순위(忠順衛)요, 주영(仲英)은 사직(司直)이고 중합(仲菌)은 장군 만호를 지냈다.

영(領)은 세 아들을 두셨으니 맹명(孟明)은 별시위(別侍衛)요, 증명(仲明), 계명(李明)은 생원이다. 계명이 상소하여 요승 보우(普雨)를 물리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한유(韓愈)의 천년 뒤에 오직 남계명이 있다”라 하였다.

수(須)는 세 아들을 두셨으니 진(莀)은 별시사직(別侍司直)이고, 손(孫)은 진주병사(晋州兵使)요, 전(荃)은 성균진사(成均進士)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처럼 자손들이 대대로 번성하여 각 고을에 널리 퍼져 명망 높은 삶을 살고 벼슬하는 자손들이 끊이지 아니하여 남들이 우러러보는 완연한 동국의 성족(盛族)이 되었으니 공이 후손에게 끼치신 음덕 아닌 것이 없다.

 

아 이제 공이 돌아가신 지 오백여 년이나 되어 여러 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집에 소장해 두었던 고적이 다 소멸되고 없어져서, 공의 덕이 있는 가르침과 아름다운 사적 및 생졸 연대를 징험할 수 없음이 후손들이 백세지한(百世之恨)이 되었도다.

 

숙종 계해(1683)년에 9세손 연(埏), 우(遇), 명익(溟翼), 명운(溟運)이 처음으로 묘의 비명을 새겨 지문(誌文)을 만들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벗겨지고 떨어졌으며 문헌이 간결하고 정밀하지 못하다 하여 기년(耆年), 종화(鍾和), 목영(穆永)이 고쳐 세우기로 의논하고 나에게 불후(不朽)의 묘갈명을 지으라는 책임을 지으니 (후손으로서) 앞장서서 할 처지에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삼가 보첩(譜牒)의 기록을 증거로 하여 아래(右)와 같이 서술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빛나고 빛나도다.

우리 시조 할아버님께서는 당나라에서 오셨도다.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벼슬하신 분들이 눈부시게 빛났도다.

공은 고려 말에 태어나시어 중랑장을 지내셨다.

고려의 운이 이미 떠나갔는데도 일편단심으로 전왕에게 충성을 하였도다.

동해에 자취를 감추어 삼강오륜을 북돋우고 심었으며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산수간에 소요(逍遙)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음덕과 경사로움이 길이 후손에게 미치어, 자손들을 오랫동안 성하고 성하게 하였도다.

삼한 땅을 돌아보니 바다는 넓고 넓다.

화방동산 한 구역에 장사를 지냈으니 산은 높고 물은 도다.

비명을 고쳐 세우니 훌륭한 덕행이 더욱 빛나도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절을 갖추시라. 큰사람의 무덤이로다"

 

후손 조엄(朝曮)이 삼가 짓다.

상규 근서(相奎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