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공
8세 현감공(縣監公) 휘 이(頤)의 생애와 업적
명문 거족의 기틀과 훌륭한 가계(家系)
현감공의 휘는 이(頤)로, 영양 남씨(英陽南氏)의 시조인 당나라 출신 영의공(英陽公) 휘 민(敏)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고려조의 중대광 첨의찬성(重大匡 僉議贊成)을 지낸 일세조 휘 홍보(洪輔) 이래로 대대로 현달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부친이신 휘 영번(永蕃)은 호위낭장으로 내시원에 출사하였으며, 현감공은 슬하의 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형인 호(顥)는 장군 만호(萬戶)를 지냈고, 셋째 영(領)은 사마(司馬)에 올랐으며, 넷째 수(須)는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내는 등 형제 모두가 문무에 걸쳐 가문의 화려한 광영을 떨쳤다.
세종대(世宗代)의 치세와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헌신
현감공은 문과 무의 재주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다. 조선의 최고 성대(盛代)라 불리는 세종 연간에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 간발(簡拔, 가려 뽑힘)되었다. 묘갈명에서 공의 직책 수행을 '순양(循良)'이라 일컬은 점이 돋보이는데, 이는 단순한 행정관을 넘어 법도를 엄격히 지키면서도 백성을 아끼고 선정을 베푸는 모범적인 지방관이었음을 증명한다.
단종(端宗) 애사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낙향
현감공의 생애에서 가장 강직한 성정이 드러나는 대목은 단종의 손위(遜位) 사건, 즉 왕위가 강탈당하는 묘변(廟變)에 직면했을 때다. 공은 불의한 권력에 영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막내아우인 용담현령 수(須)와 함께 미련 없이 관복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길을 택했다. 이는 조선 시대 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충(忠)과 절의(節義)를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준 위대한 결단이다.
후대와 가문의 창성(昌盛)
비록 수차례의 참혹한 병란(兵亂)을 겪으며 문헌이 불타 공의 정확한 생몰년과 배위(配位, 부인)의 기록이 궐손(闕損)된 아쉬움이 크나, 공의 위대한 덕행은 후손들에게 깊은 귀감이 되었다. 공은 장자 충순위 중지(仲芷), 차자 사직 중영(仲英), 삼자 어모장군 만호 중함(仲菡) 등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 후손이 가문의 맥을 창성하게 이어 나갔다.
후손의 도리와 정성
현감공의 묘역은 군 남쪽 20리 장정방어사동에 조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후손 유순과 노신이 처음 묘표를 세워 선조의 뜻을 기렸으나, 세월이 흘러 비석의 글자가 마모되자 1920년(경신년) 후손 종화(鍾和)가 다시금 묘갈명을 정식으로 새겨 세웠다. 이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꼿꼿한 선비정신을 지킨 현감공의 얼을 영원토록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종중의 지극한 정성과 자부심의 발로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