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사공

록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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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jpg 8세 록사공 휘 계문(啓文)의 생애와 업적

 

영양남씨 8세조 계문(啓文) 선조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변기 속에서 굳건한 지조를 지키며, 오늘날 영양남씨 록사공파(錄事公派)가 번성할 수 있는 위대한 기틀을 마련한 입향조(入鄕祖)이다.

 

명문 사대부의 연원과 록사공파의 뿌리

계문 선조는 신라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을 시조로 모시고, 고려 왕조에서 중대광(重大匡)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한 위대한 선조 홍보(洪輔)의 6세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이신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 혁(奕), 조부이신 경전녹사(慶殿錄事) 승경(承敬), 그리고 부친이신 진사(進士) 의(顗)로 이어지는 뼈대 있는 사대부 가문의 맥을 이었다. 특히 조부 승경 선조의 관직명인 '녹사(錄事)'는 훗날 후손들이 록사공파를 형성하는 역사적 연원이 되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와 울진 입향(入鄕)

선조께서는 고려 시대에 진무부위(進武副尉)라는 무관 품계에 오르며 국가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1392년(공양왕 임신년), 고려가 막을 내리고 조선이 건국되는 왕조 교체의 거대한 풍랑 속에서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굳은 지조로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예천(醴泉) 행솔리를 떠나 선사(仙槎, 옛 울진)로 은거하였다. 이는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 속에서 가문의 안위를 지키고 새로운 터전에서 후손들의 미래를 열어주기 위한 현명하고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명망 높은 가문(望族)으로의 도약과 번성

울진에 새롭게 터를 잡은 선조의 혜안은 훌륭한 후손들의 번성으로 꽃을 피웠다. 부인 숙부인(淑夫人)과의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며, 자손들은 학문과 관직 두루 두각을 나타내며 가문을 고을의 망족(望族, 명망 높은 가문)으로 이끌었다.

장남 각(閣)은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사(忠淸都事)와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으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마을 입구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차남 한(閑)은 별시위(別侍衛)를 지내며 무반의 늠름한 기풍을 이었다. 삼남 윤(閏)과 사남 개(開)는 성균생원(成均生員)에 올라 가학의 깊이를 더했다.

두 딸은 당대의 진사인 이정실(李廷實)과 장재(張載) 가문과 혼인하여 탄탄한 사대부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이후 치인(致仁), 치의(致義), 치례(致禮), 효원(孝元), 효온(孝溫) 등 뛰어난 손자 세대로 이어지며 록사공파의 찬란한 교두보가 완성되었다.

 

중룡산의 안식처와 흔들리지 않는 숭조(崇祖) 정신

선조의 묘소는 울진군 북면 소야(蘇野) 중룡산(仲龍山) 해좌(亥坐) 언덕에 부인 숙부인과 합봉(合封)으로 평안히 모셔져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과거 묘표(墓表)의 기록 중 일부 사실과 다른 오류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후손들은 뜻을 모아 족보와 문헌을 철저히 교차 검증하여 이를 바로잡았다. "구름과 안개가 가득해 하늘이 가려져도 본질을 해치지 않는다"는 새로 새긴 묘표의 명문처럼, 시대를 뛰어넘어 선조의 위대함을 온전히 지켜내고자 하는 영양남씨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과 숭조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