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공
송정공 생애와 행적
영양남씨 8세조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의 생애와 업적
1395(태조 4) ~ 1477(성종 8), 향년 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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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가문의 배경 |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는 1395년(태조 4) 영양남씨 대광공파(大匡公派) 7세 남영번(南永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남혁(南奕)은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조부 남승고(南承顧)는 종부시동정(宗簿寺同正)을 역임하였으며, 부친 남영번은 신호위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郎將)으로서
울진에 입향하여 영양남씨 울진 세거의 터전을 마련한 인물이다. 모친은 최유의(崔有漪)의 딸 강릉최씨이다.
남수의 형인 만호(萬戶) 남호(南顥)는 세종 때 울릉도 토벌에 공을 세운 무반으로 만호공파의 파조이고, 셋째 형 남영(南領)은 반송공파의 파조, 둘째 형 남이(南頤)는 정읍현감을 지낸 현감공파의 파조이다. 이처럼 남영번의 네 아들은 각각 대광공파 산하 주요 분파의 파조가 되어 영양남씨 대광공파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남수는 상호군(上護軍) 백인(白璘)의 딸 대흥백씨(大興白氏)와 혼인하였다. 이 혼인을 통해 처향(妻鄕)인 영해(寧海, 현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영해 지역 영양남씨 600년 세거의 기원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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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력(官歷)과 용담현령의 선정(善政) |
남수는 1417년(태종 17) 23세의 나이로 문선(文選)되었다. 이후 1425년(세종 7) 다방(茶房)에서 처음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직장(直長), 주부(主簿), 통례(通禮)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39년(세종 21) 통선랑(通善郞)에 올랐고, 이듬해인 1440년 승훈랑(承訓郎)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관(判官)과 창사(倉使)를 거쳐 1443년(세종 25)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사헌부감찰은 정6품의 감찰관직으로, 백관의 기강을 규찰하는 사헌부의 실무 요직이다.
1444년(세종 26) 9월에는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용담은 현재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일대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남수는 이 외직(外職)에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기를 마친 뒤 1448년 봄 고향인 영해로 돌아왔다. 다방 서사에서 용담현령에 이르기까지 약 23년간의 관력은 승진 속도로 보아 무난하면서도 성실한 관료 생활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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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종을 향한 절의(節義)와 은거의 삶 |
남수의 생애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단종 손위(遜位) 이후의 결단이다. 1455년(세조 원년)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자, 남수는 더 이상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영해에서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스스로 호를 '송정거사(松亭居士)'라 고쳐 칭하였다.
'송정(松亭)'이라는 호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로, 변치 않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거사(居士)'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남수는 이 호를 쓰면서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의와 세조 왕위에 대한 불인정의 뜻을 자호 속에 함축한 것이다.
성균전적겸남학교수인 헌납(獻納) 김대(金臺)는 남수의 묘갈명에서 그의 절의를 다음과 같이 높이 칭송하였다.
"어물어물 하지도 않고 굴하지도 않는 것은 순수한 덕성이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누워 쉰 것은 절의를 숭상함이요, 끝까지 옛 주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 헌납 김대, 송정공 묘갈명이 묘갈명은 남수의 절의를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강직한 덕성, 둘째는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 행위 자체가 곧 절의의 실천이라는 것, 셋째는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죽는 날까지 지켰다는 종신불변의 충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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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후손이 이어간 학문과 절의의 전통 |
송정공은 83세의 천수를 누린 뒤 1477년(성종 8)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花田)에 자리하며, 묘갈명은 앞서 언급한 헌납 김대가 찬술하였다.
송정공의 후손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이다. 남사고는 송정공의 형 만호 남호(南顥)의 증손으로, 형의 계통이기는 하나 송정공파 계보 자료군의 일원이다. 그는 역학(易學), 천문(天文), 지리(地理)에 통달하여 동서분당과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며, 선조 초 천문교수로 천거되었다. '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았다.
송정공의 직계 후손 가운데 난고(蘭皐) 남경훈(南慶勳, 1572~1612)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균관 진사로서, 영양남씨 가운데 유일한 불천위(不遷位)이다. 그의 종택인 난고종택은 2012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어 400년간의 가문 역사를 전하고 있다. 이 종택에 전래되는 『영산가학(英山家學)』(12책)은 송정공의 후손 15세 350년간의 유고를 집대성한 시문집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48호로 지정되어 현재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이 전적 속에 「송정실기(松亭實記)」가 수록되어 있어 송정공의 행적을 전하는 가장 직접적인 문중 기록이다.
한편, 석호(石湖) 남실(南實)은 송정공의 후손으로 청송 안덕에서 출생하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 되기 위해 대구 동구 입석동으로 이거하였다. 이로써 대구 지역 영양남씨 세거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용암(龍菴) 남명신, 예연(禮淵) 남석로 등 다수의 학자를 배출하며 영남학파의 한 줄기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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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존하는 유적과 문화재 |
송정공과 그 후손들이 남긴 유적은 경상북도 영덕군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에는 후손들이 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화재및육영루(花齋및毓英樓)가 있는데, 화재는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고 육영루는 후학을 양성하는 강당이다.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송정공파가 건축하고 소유하는 처인당(處仁堂)이 있다. 영양남씨가 약 600년간 세거해 온 인량리 종가에 딸린 별당으로,종가는 소실되고 이 별당만이 남아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인량리의 영양남씨는 17세기 이후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활발한 학문 활동을 전개한 문중이며, 처인당은 그 역사적 상징으로서 역시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울진에 소재하는 영양남씨 중랑장 문중은 222책의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데, 진무원종공권 1건을 제외한 전부가 송정공 남수의 계보를 잇는 가계의 자료들이다. 남사고의 『격암선생일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수제자 남진영의 『무실재사고』, 그리고 전우가 남진영에게 보낸 친필 편지가 포함된 『간재선생필첩』 등이 포함되어 있어, 송정공 이래 면면히 이어진 학문적 전통을 실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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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
송정공 남수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사헌부감찰과 용담현령을 역임하며 성실한 관료 생활을 영위하다가, 단종 손위라는 역사적 격변 앞에서 불사이군의 절의를 선택한 인물이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은 그의 결단은 소나무 정자를 뜻하는 '송정(松亭)'이라는 호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헌납 김대의 묘갈명을 통해 후대에까지 높이 전해지고 있다.
공의 후손들은 격암 남사고, 난고 남경훈, 운강 남계조, 석호 남실 등 학문과 충의의 전통을 이어가며 경상북도 동해안과 대구 지역에 걸쳐 광범위한 세거 기반을 구축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난고종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화재 및 육영루와 처인당, 그리고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인 영산가학 등의 문화재는 송정공 이래 600년에 걸친 가문의 역사와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