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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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jpg 송정공 유적

 

영양남씨 송정공파 개기지(開基址), 인량(仁良)마을

 

어진 인재의 산실, 인량마을의 유래와 풍수 형승

nam3_3_6-1.jpg영양남씨(英陽南氏) 송정공파(松亭公派)의 개기(開基) 터인 인량리(仁良里)는 예로부터 명현(名賢)이 다수 배출되어 '어진 분이 많이 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 지명은 잉량화(仍良火)이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 원년, 뒷산의 지형이 학이나 매가 날아갈 듯한 형국이라 하여 '나래골' 또는 '익동(翼洞)'이라 불리다 1610년(광해군 2)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숙종 연간에는 일명 '비개동(飛蓋洞)'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래골의 음이 변하여 한자로 '국동(國洞)'으로 표기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산천의 형승을 살펴보면, 태백산맥의 준령이 남으로 뻗어 일월산(日月山)에 정기를 맺고 동남으로 감돌아 등운산(騰雲山)에 지령(地靈)을 발한다. 그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날개 모양으로 펼쳐지니, 영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정남향으로 터를 잡은 명당이다.

마을 뒤편에는 주산(主山)인 인량대산(仁良大山, 등운산)이 높이 솟아 웅치(雄峙)를 이루며 마을을 품어 안고 있다. 영해 원구 시리목재와 병곡 사천의 목, 그리고 쟁이골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며 영맥(靈脈)을 이어준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의 풍수 대가 두사충(杜思忠)이 이곳의 산천 경관을 둘러보고 “자줏빛 기운이 열 장 높이로 솟아오르니 반드시 훌륭한 대인(大人)이 태어날 곳이다(紫氣高一丈 必生大人)”라며 산수의 수려함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8종가 12씨족이 뿌리내린 전통의 요람

nam3_3_6-1.jpg일설에 따르면 인량은 삼한(三韓)시대 부족국가였던 우시국(于尸國)의 도읍지로서 '국동(國洞)'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본래 단양 신씨(丹陽 申氏)와 수안 김씨(遂安 金氏), 그리고 남평 문씨(南坪 文氏) 등이 살았으나 대홍수 등의 변고로 떠난 빈터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대한제국 시기에는 영해군 서면(西面)에 속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인상동과 인하동을병합하여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인량리로 개칭되어 현재 인량 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병곡면 사천리, 서쪽으로는 가산리와 신기리에 접하며, 남쪽 들판 너머 영해면 원구리와 마주하고 북으로는 칠보산이 자리한다. 인량마을은 영해 5대성(大姓)으로 불리는 안동 권씨, 영양 남씨, 무안 박씨, 대흥 백씨, 재령 이씨가 터를 잡아 크게 번성한 곳이다. 그 외에도 함양 박씨, 야성 박씨, 평산 신씨, 영천 이씨, 야성 정씨, 일선 김씨, 신안 주씨 등 도합 12씨족이 입향하여 세거(世居)하고 있다. 한 마을에 무려 8개의 종가(八宗家)가 자리한 유서 깊은 곳으로, 비록 땅이 척박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예의와 겸양의 풍속이 순후하여 문예(文藝)에 힘쓴 결과 수많은 학자와 관료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다.

 

 

 

처인당

 

nam3_3_6-1.jpg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123-1번지에 자리한 처인당은 2018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6호로 지정된 영양남씨의 자랑스러운 핵심 유산이다.

 

이 건물은 1420년경 영양 남씨 인량리 입향조인 송정공 남수(南須)가 처음 터를 잡은 자리에, 조선 후기 참봉공 남필대(南必大, 1608~1666)가 종택의 별채로 처음 건립하였다. 훗날 후손인 남달만(南達萬, 1713~1784)이 건물을 중수하며 본인의 호를 따 '처인당(處仁堂)'이라 명명하였다. 문중 선조들의 정확한 기록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건립 내력은 귀중한 뼈대가 된다.

 

nam3_3_6-1.jpg건축학적으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웅장한 팔작지붕 구조를 띠고 있다. 특히 경사진 지형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정면에서 바라보면 2층 누각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점이 백미이다.중앙의 2칸 대청마루 양옆으로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선비의 기품을 더했으며, 향후 종중 자산의 3D 모델링이나 건축 사료 복원 시 그 입체적인 구조미가 크게 돋보일 건축물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가문의 인재 양성 장소인 동시에, 임진왜란 당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된 남율(南栗) 등 여러 의병을 배출한 호국의 산실이기도 하다. 6.25 전쟁으로 인해 애석하게도 종택의 정침(본채) 등은 소실되었으나, 처인당 정자와 사당만큼은 화마를 피하여 옛 모습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선조들의 굳건한 기상을 오늘날까지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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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와 육영루

 

nam3_3_6-1.jpg화재(花齋) 및 육영루(毓英樓)는 영양남씨 일족이 남수(南須)[1395~1477]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남수의 본관은 영양, 호는 송정(松亭)이다. 남수는 영양남씨의 인량리 입향조이다.

창수면 인량리 사족 백승(白昇)의 딸 대흥백씨와 혼인하면서 울진에서 인량리로 이거하였다.

위치는 영덕군 축산면 칠성2리 재궁마을에 있다. 재궁마을은 꽃밭[花田]과 짙밭[泥田] 2개의 자연촌락이 있는데, 화재와 육영루는 꽃밭에 있다.

마을 앞 작은 연못에 연꽃이 무성하여 꽃밭이라고 불렀다. 짙밭에도 영양남씨 재실이 있으나, 현재 현판이 없고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

 

nam3_3_6-1.jpg1774년(영조 50) 건립하였다. 화재는 남수에게 봉사(奉祀)하기 위한 재실, 육영루는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강당으로 활용하였다.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오갑인사월십칠일묘시립주오시상량(崇禎紀元後五甲寅四月十七日卯時立柱午時上樑)'라고 기록되어 있어 1914년 중건 또는 전면적인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왼쪽에 화재, 오른쪽에 육영루가 자리잡고 있다.

화재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이다. 건물 앞면과 양익사는 우산각지붕이고 뒷면은 서산각지붕이다. 평면구성은 '口' 자형이다. 상부가구는 2량 구조법이며, 벽체는 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모르타르로 마감되어 옛 모습을 잃었다.

 

nam3_3_6-1.jpg육영루는 중층의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어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앞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둘렀고, 툇간 하부에는 기둥을 설치하여 누마루를 이룬다. 가구는 5량가이다.

2002년 2월 14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nam3_3_6-1.jpg건물 옆에 남수의 묘와 행적비, 묘역정화비 등이 세워져 있고, 중수•중건으로 당시의 건축수법이 남아 있지 않지만, 향토의 문화유산이라는 데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