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송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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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jpg 8세 반송공(攀松公) 휘 영()의 생애와 발자취

 

반송공(攀松公) 휘 영(領)은 영양 남씨(英陽南氏) 8세손으로, 1391년(홍무 신미년)에 태어나 1458년(천순 무인년) 68세의 일기로 타계한 조선 전기의 인물이다. 그의 자는 구순(裘順)이며, 호는 반송거사(攀松居士)이다. 아버지는 신호위 보승랑장(神虎衛保勝郎將)을 거쳐 내시원(內侍院)에 봉직했던 남영번(南永蕃)이고, 어머니는 순성보리공신 중대광 강릉군 최안소(崔安沼)의 손녀이자 용흥사 진전직 최유의(崔有漪)의 딸인 최씨(崔氏)이다. 조부는 종부령(宗簿令)을 지낸 남승고(南承顧)이며, 증조부는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에 오른 남혁(南奕)으로 이어지는 명문가의 혈통을 이었다.

 

구보(舊譜)의 기록에 따르면 공은 진사시와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전해지나, 실제 묘지명에는 평소 풍습병(風濕病)을 앓아 이를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신 그는 스스로를 '반송거사'라 칭하며 평생 학문 수양과 내면을 닦는 데 매진하였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우아하였으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지은 시가 무려 천여 편에 달할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깊었다. 세상의 수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였음에도 이를 입신양명을 위해 쓰지 않았고, 오직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만 뜻을 두었으며 화답해 주는 이가 적은 안타까움을 시로 달래곤 하였다.

 

가정적으로 공은 첫 부인인 전씨(田氏)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전씨는 목은 선생 문하에서 급제한 전자수(田自壽)의 손녀이자 선교랑 진성태수 전익(田 )의 딸이다. 장남 맹명(孟明)은 별시위(別侍衛)를 지냈고, 차남은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3남 중명(仲明)은 우군사정(右軍司正)을 지냈다. 외동딸은 충순위 행사정 김자숙(金自肅)과 혼인하였다. 후처로는 오씨(吳氏)를 맞이하였다. 특히 넷째 아들 계명(季明)은 아버지 공이 타계하자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지극정성으로 상을 치렀으며, 훗날 이천교수(伊川敎授)에 천거되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반송공은 1458년 4월 1일에 병으로 타계하여 이듬해 10월 합천(陜川) 금양역(金陽驛) 뒤 만대산(萬岱山) 용계사(龍溪寺) 경내에 안장되었다. 세월이 흘러 묘소의 위치가 희미해지고 한때 의령 남씨(宜寧南氏) 선조의 묘로 오인받기도 하였으나, 1783년(정조 계유년) 진주병사 남헌철(南憲哲)이 묘지석(墓誌石)을 발굴해 냄으로써 비로소 공의 묘소임이 뚜렷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1808년(순조 무진년) 11대손 석진(錫進)이 묘역의 봉분을 새롭게 고쳐 쌓으면서 오늘날까지 그 숭고한 얼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