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족보편찬사

영양남씨 족보편찬사

영양남씨 족보 편찬사 개관(英陽南氏 族譜 編纂史 槪觀)

 

영양남씨(英陽南氏)는 신라에 연원을 둔 유서 깊은 성씨로서,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고려·조선 양대를 거치며 명문(名門)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그 족보 편찬은 조선 후기에 본격화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차에 걸친 증보(增補)와 간행(刊行)을 거듭하여 왔다.

영양남씨의 정통 본류(本流)는 시조 영의공(英毅公)의 후예로서 영양관 중시조 홍보(洪輔)를 받드는 중대광공파(中大匡公派)이며, 본 대종회가 그 계통을 오롯이 계승한다. 한편 안동파(安東派)로도 칭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는 그 중시조를 군보(君甫)에 두니, 이는 의령관 중시조와 한 뿌리로서 영양 본류와는 계통을 달리한다.

본고(本稿)는 이러한 본류 정통의 관점에서 중대광공파와 밀직공파의 족보 편찬사를 통관(通觀)하되,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고성남씨(固城南氏)의 보사(譜史)는 논외(論外)로 한다.

 

mark1.jpg 1. 족보 편찬의 서막(序幕)

 

영양남씨의 시조 남민(南敏)은 신라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중국 여남(汝南)에서 동래(東來)한 인물로 전해진다. 고려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영양·의령·고성 등지로 분관(分貫)하여 각 본관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남씨 계보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16세기 중엽 영양남씨 남사고(南師古, 1509~1571)에 의하여 처음 시도된 것으로 전해지나, 이때 편찬되었다는 울평보(蔚坪譜)는 현전(現傳)하지 아니하여 그 구체적 면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 계보 의식(系統意識)은 후대 중대광공파의 정미보(丁未譜)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mark1.jpg 2. 조선 후기, 체계적 족보 편찬의 발단

 

17세기 초, 밀직공파의 남융달(南隆達, 1565~1652)이 1622년(광해군 14) 안동에서 임술보(壬戌譜) 편찬을 도모하니, 이것이 영양남씨 최초의 본격적인 족보 편찬 시도이다. 그 유업(遺業)은 아들 남자(南磁, 1601~1683)에게 이어져 1680년경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남자의 별세(別世)로 간행이 지연되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남자의 손자 남천호(南天浩, 1635~1716)를 비롯한 후손들이 1712년(숙종 38) 안동 남흥재사(南興齋舍)에서 임진보(壬辰譜)를 3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으로 간행하였다. 이 임진보는 오늘날 전하는 밀직공파(안동파) 족보의 실질적 효시(嚆矢)로 평가된다.

한편 영해(寧海)를 중심으로 한 우리 중대광공파에서는 1727년(영조 3) 정미보(丁未譜)를 간행하였다. 이는 실전된 울평보의 계보를 계승한다는 취지 아래 편찬되어, 본류 일족(一族)의 계통의식을 정립하고 가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전범(典範)이 되었다.

 

 

mark1.jpg 3. 역대 족보의 전개 과정

 

⊙ 1712년 임진보(壬辰譜)

현전하는 밀직공파 최초의 체계적 족보이다. 주목할 것은, 당시 안동(밀직공파)과 의령남씨 사이에 중시조 군보(君甫)의 후손임을 둘러싼 세계(世系) 인식의 이견(異見)이 있었다는 점이며, 임진보에는 이에 관한 논변(論辨)이 담겨 있다. 이는 안동파의 상계(上系)가 그 출발에서부터 확정적이지 못하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 1727년 정미보(丁未譜)

울평보의 계보를 계승하여 간행한 중대광공파의 실질적 첫 족보로서, 본류 계통의식의 정립을 분명히 한 전범이다.

 

⊙ 1765년 을유보(乙酉譜)

밀직공파의 단독 족보로 발간되었다. 이 족보는 ‘5세 삼기(三奇) - 봉우(鳳羽) - 득온(得溫)·득량(得良)·득공(得恭)·득검(得儉)’의 계보를 밀직공파로 기록하였으니, 이 대목이 훗날 세계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더욱이 을유보는 당대에도 이미 위서(僞書)로 지목되던 선계고적(先系古蹟)’을 그대로 수록함으로써, 사료로서의 신뢰성에 스스로 중대한 흠결을 남겼다.

 

⊙ 1810년 경오보(庚午譜)

중대광공파와 밀직공파(안동파)가 최초로 합보(合譜)를 이루어 문중 화합과 족보의 체계적 정비를 도모하였다. 두 파의 상계가 지리적으로 인접하였던 점이 합보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족보에 이르러 삼기 이하 세계가 본류인 중대광공파로 복원(復元)되었고, 위서인 선계고적도 자취를 감추어 비로소 정상적인 족보의 간행이 시작되었다. 이 합보의 결실은 후일 남씨 대동보 성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 1855년 을묘보(乙卯譜)

jokbo1855.jpg경오보 편찬 당시 누락된 자손록(子孫錄)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오보 속편(續編)’으로 간행되었다. 경오보 3권과 합하여 총 21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을 완성하였다.

 

⊙ 1890년 경인보(庚寅譜)

중대광공파와 밀직공파가 경오보·을묘보에 이어 세 번째 합보를 발간함으로써 통합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 1934년 갑술보(甲戌譜)·1938년 무인보(戊寅譜)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합보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에 중대광공파는 1934년(갑술년)에, 밀직공파는 1938년(무인년)에 각기 독자적인 족보를 발간하였다.

 

 

mark1.jpg 4. 현대 족보와 통합의 노력, 그리고 남겨진 과제

 

1957년 정유 대동보(丁酉大同譜)

jokbo1957.jpg남씨 각 파의 족보를 단일화하려는 오랜 염원이 처음으로 결실을 맺은 족보이다. 이 대동보는 영양관 중시조 홍보(洪輔), 안동·의령관 중시조 군보(君甫), 고성관 중시조 광보(匡甫)를각각 1세(世)로 삼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한편 편찬 과정에서 ‘5세 삼기 - 봉우 - 득온·득량·득공·득검’ 계보의 귀속을 둘러싼 이견이 다시 대두되었다. 수백 년의 기록을 무력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움직임을 좌시할 수 없다는 본류의 명분은 지극히 정당하였으나, 그 논란의 와중에 중앙의 미흡한 중재로 말미암아 끝내 중대광공파에 속하는 수사공파(水使公派, 삼기 - 봉우 - 득량 - 희)가 대동보에서 누락되는 결과를 빚어, 완전한 통합에는 한계를 남기고 말았다.

 

 

 

 

⊙ 1979년 기미 대동보(己未大同譜)와 영양남씨 세보(世譜)

jokbo1979.jpg1979년 기미 대동보 발간 시에도 통합의 노력은 지속되었으나, 정유 대동보 당시 문제가 되었던 수사공파의 계보 문제로 또다시 이견이 발생하였다.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아니하자,본류인 중대광공파는 역사적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대동보 편찬을 거부하고 별도의 영양남씨 기미 세보(己未世譜)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행된 기미세보의 문헌록(文獻錄)에는 세계 이계(移系) 문제에 대한 본류의 입장과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전말(顚末)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본류가 일관되게 정사(正史)를 수호하여 왔음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 1993년 계유 대동보(癸酉大同譜)

jokbo1993.jpg현대적 통합본으로 평가받는 족보이다. 상계에 관한 이견은 상호 인정하되 수권(首卷)에 각 파의 주장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논쟁을 최소화하고 대동(大同)의 정신을 존중하였다.

오랜 논쟁의 대상이던 세계 문제는, 본디 4형제 전부가 본류의 계보였으나 대동의 정신에 따라 중대광공파가 그 절반을 양보한 최종 결정에 따라 ‘온(溫)·량(良)은 중대광공파’, ‘공(恭)·검(儉)은 밀직공파’로 정리하여 편찬되었다. 다만 합의에 이른 구체적 경위는 기록이 전하지 아니한다. 계유보는 중대광공파 자손록을 1·2·3권에, 밀직공파 자손록을 4·5·6권에 수록하였으며, 오늘날 영양남씨 디지털 족보 구축의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mark1.jpg 5. 고상계(古上系) 문제와 역사 기록에 임하는 자세

 

조선 초기 종법(宗法) 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의 기록은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영양남씨 또한 시조 영의공(英毅公) 이후 중시조 대에 이르기까지 약 사오백 년간의 기록이 실전(失傳)되어, 족보에는 척(倜)·익(翼) 두 분의 휘(諱)만이 전할 뿐 명확한 고상계의 확인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근래 위서성(僞書性)이 짙은 가첩(家牒)이나 구전(口傳)을 근거로 학술적 검증 없이 상계를 왜곡하여 전파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멀리는 을유보의 선계고적 수록과 삼기 이하 계보의 자의적 이계(移系)가 그러하였듯, 이는 남씨의 유구한 역사를 훼손하고 기록을 오염시킬 수 있는 매우 우려스러운 행위이므로, 우리 종인(宗人) 모두가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바이다.

검증된 사료에 근거한 기록을 존중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정사(正邪)를 분별할 때, 비로소 족보의 진정한 가치가 보존되고 계승될 것이다. 본류로서 우리 대종회가 짊어진 책무가 바로 여기에 있다.

 

 

mark1.jpg 6. 영양남씨 족보 편찬의 의의와 미래의 과제

 

1993년 계유 대동보가 발간된 지 30여 년이 지나, 이제 자손록을 갱신하여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세대 간 인식의 차이로 족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약화되는 현실 속에서, 영양남씨 본류의 근원과 정체성을 보존하고 기록의 단절을 막아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이에 우리 영양남씨 대종회는 약 3년 전부터 디지털 족보(인터넷 족보) 구축 사업에 착수하였다. 한자와 서책 형태의 족보가 지니는 불편을 극복하고, 모든 세대가 컴퓨터와 스마트 기기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족보를 구현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면밀한 계획과 거듭된 숙의(熟議)를 통하여 독보적이고 차별화된 디지털 족보를 완성하여야 할 것이다. 이 디지털 족보는 영양남씨 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는 핵심 자산으로서, 그 무결성(無缺性)·연속성(連續性)·신뢰성(信賴性)이 반드시 보장되도록 구축하고 운영해 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英陽南氏 大宗會 世譜編纂委員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