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중대광공 단소
화방묘역 및 중시조 단소

1. 영양남씨 역사의 출발점, 화방묘역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510번지에 자리한 화방묘역은 영양남씨의 숭고한 역사가 태동한 근원지이자 굳건한 정신적 요람이다. 이곳은 울진 입향조(入鄕祖)인 중시조 중대광공(重大匡公) 남홍보(南洪甫)를 비롯해, 가문의 기틀을 다진 상계(上系) 선조들의 제단을 모신 신성한 공간이다. 묘역 입구에 우뚝 선 만뢰문(萬賴門)을 지나면 정면으로 단아한 비각이 그 위용을 드러내며, 그 중심에 가문의 뿌리를 상징하는 중시조의 제단비가 자리하고 있다.
2. 중시조 중대광공 남홍보 (1세조)
중시조 남홍보는 당나라 안렴사를 지낸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후손으로, 고려 시대 에 중대광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라는 지고한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탁월한 공적으로 영양남씨의 가통이 크게 빛났으나, 기나긴 세월의 풍파 속에서 사적과 묘소, 배위(配位)에 관한 문헌 기록이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그 온전한 행적을 추모하는 데 큰 아쉬움이 따랐다.
3. 단소와 제단비의 건립
이에 영양남씨 대종회와 문중 원로들은 선조를 향한 지극한 정성을 모아, 1977년 3월 울진 화성리 인목재(禋睦齋) 곁에 제단을 축조하고 제단비를 건립하였다. 기와를 얹은 아늑한 담장 안, 북쪽 중앙의 비각 속에 안치된 제단비의 비신(碑身) 전면에는 ‘고려중대광영양군남공제단(高麗重大匡英陽君南公祭壇)’이라는 명문이 장엄하게 새겨져 있다. 아울러 측면과 후면에는 후손 남병기가 찬(撰)한 비문이 건립 경위와 연대를 상세히 기록하여, 공의 유덕을 만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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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광공 제단비명 |
우리 남씨가 득성(得姓) 한 것은 신라(新羅)때 영의공(英毅公) 휘(諱) 민(敏)이 식읍(食邑)으로 영양(英陽)을 받으시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삼파(三派)로 나뉘어 졌는데 홀로 장파(長派)만이 영양으로 관향(貫鄉)하였으니 이는 대광공 휘 홍보(洪輔)가 영양으로 습봉(襲封)되었기 때문이다.
아 공은 고려조에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증대광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니 공의 덕망과 공훈(功勳)이 그 시대에서 으뜸이 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자손(雲仍)이 번성하여 (振振) 끊어지지(繩繩)않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니 그 쌓으신 덕(德)과 남기신 음덕(蔭德)을 알 수 있으나, 세월이 흘러가고 창상(滄桑)이 변하여 문헌(文獻)에 고징(考徵)이 없어 그 덕행(德行)과 언행(言行) 생졸년월일(生卒年月日) 묘소, 배위(配位)의 성씨(姓氏) 본관(本貫)까지 모두 잊어버려 전하지 않으니 이는 후손들의 무궁(無窮)한 한(恨)이며 오직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만이 쓴 것이 옳은가.
자(子)는 겸(謙)이니 위위주부령동정(衛尉注簿令同正)이요, 손(孫)은 숙손(淑孫)이니 급제검교예빈경(及第檢校禮賓卿)이요, 증손(曾孫)은 지탁(之卓)이니 급제요, 현손(玄孫)은 요(堯)요, 혁(奕)은 진사(進士)로서 예빈경(禮貧卿)이요, 삼기(三起)는 진사(進士)이다. 혁(奕)의 자는 승경(承敬) 영경전녹사(令慶殿錄事)요 승고(承顧)는 종부시령판사(宗簿寺令判事)로 치사하였으며 삼기(三起)의 자는 봉우(鳳羽)요, 승경(承敬)의 자(子)는 의(顗)니 진사(進士)요, 승고(承顧)의 자는 유번(有蕃)이니 군기시(軍器寺)의 정(正)이요, 또 영번(永蕃)이니 내시전신호위보승중랑장(內侍前神虎衛保勝中郎將)이요, 봉우(鳳羽) 의 자는 득온(得溫)이니 판사(判事)요, 또 득량(得良)이었는데 홀로 장파(長派)만이 영양으로 관향(貫鄉)하였으니 이는 대광공 휘 홍보(洪輔)가 영양으로 습봉(襲封)되었기 때문이다.
아 공은 고려조에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증대광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니 공의 덕망과 공훈(功勳)이 그 시대에서 으뜸이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자손(雲仍)이 번성하여 (振振) 끊어지지(繩繩)않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니 그 쌓으신 덕(德)과 남기신 음덕(蔭德)을 알 수 있으나 세월이 흘러가고 세상(滄桑)이 변하여 문헌(文獻)에 고징(考徵)이 없어 그 덕행(德行)과 언행(言行) 생졸년월일(生卒年月日) 묘소(斧堂) 배위(配位)의 성씨(姓氏) 본관(本貫)까지 모두 잊어버려 전하지 않으니 이는 후손들의 무궁(無窮)한 한(恨)이며 오직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만이 쓴 것이 옳은가.
자(子)는 겸(謙)이니 위위주부령동정(衛尉注簿令同正)이요, 손(孫)은 숙손(淑孫)이니 급제검교예빈경(及第檢校禮賓卿)이요, 증손(曾孫)은 지탁(之卓)이니 급제요, 현손(玄孫)은 요(堯)요, 혁(奕)은 진사(進士)로서 예빈경(禮貧卿)이요, 삼기(三起)는 진사(進士)이다. 혁(奕)의 자는 승경(承敬) 영경전녹사(令慶殿錄事)요, 승고(承顧)는 종부시령판사(宗簿寺令判事)로 치사하였으며, 삼기(三起)의 자는 봉우(鳳羽)요, 승경(承敬)의 자(子)는 의(顗)니 진사(進士)요, 승고(承顧)의 자는 유번(有蕃)이니 군기시(軍器寺)의 정(正)이요, 또 영번(永蕃)이니 내시전신호위보승중랑장(內侍前神虎衛保勝中郎將)이요, 봉우(鳳羽)의 자는 득온(得溫)이니 판사(判事)요, 또 득량(得良)이니 수륙병마절도사(水陸兵馬節度使)요, 의(顗)의 자는 계문(啓文)으로 진무부위(進武副尉)라 고려조(高麗朝)의 운명이 다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고 이남(二男)은 순(順)이요, 삼남(三男)은 달(達)이니 무과급제(武科及第)요, 영번(永蕃)의 자는 호(顥)니 장군만호(將軍萬戶)이고 의(顗)는 현감이요, 영(領)은 진사이니 호는 반송(攀松)이요, 수(須)는 문과 급제하고 감찰어사(監察御使)와 용담(龍潭)의 수령(守領)을 지내니 호는 송정(松亭)이요, 득량(得良)의 자는 희(禧)니 수사(水使)라.
대저 자손들이 선조(先朝)를 받들어 사모함은 사당(祠堂)과 묘위(墓位)인데 묘(廟)는 오세(五世)만 지나면 신주(神主)를 묻으나 묘(墓)는 비록 천만세(千萬歲)를 지나도 받들어 수호하는 것이니 만약에 그 유택(幽宅)을 실전하면 참배할 수도 없고 영향(影響)을 신빙(信憑)할 곳이 없으면 예부터 묘를 대신하여 제단(祭壇)을 만들어서 매년 한 번씩 제사를 받든 예(禮)로 봉사함이 정리(情理)에 합당한 예절이 아니겠는가.
예기(禮記)에「예(禮)는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요. 악(樂)은 그 출생한 바를 즐거워함이다.」라고 하였고 공자(孔子)는「너는 그 양(羊)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禮)를 아끼노라.」 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우리 종중(宗中)에서 이러한 설단(說壇)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들이 각처에 산재하고 또한 세상도 자주 바뀌어서 서로 상의할 여가도 없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끌어온 것이다.
금년 경진년(丙辰年: 1976) 봄에 울진(蔚珍)으로부터 발의하여 먼저 제사(祭祀)를 받들 자산(資產)을 모우고자 각파(各派)에서 5, 6인이 연이어 영해(寧海)를 방문하여 설단 할 것을 의논하니 혹은 「천년 동안에도 이루지 못한 일을 이 난세(亂世)에 와서 하려는 것은 마땅히 헤아려볼 일 아니겠느냐고 하니 혹은 그렇지 않다. 조상을 추존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세상의 치난(治亂)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로 결정을 못하니 부득이 여러 고을에 통첩하여 대종회(大宗會)를 열어 난상토의(爛商討議)로 의견을 귀일(歸一)시키니 인간이 지켜야 할 떳떳한 본성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 남씨대종회(南氏大宗會)에서도 서신 또는 직접 만나 몇 번이나 종용하니 가히 백대(百代) 친친(親親)의 족의(族誼)라고 할 수 있고 후손들의 마음이 더욱 감동되어 일을 시작할 기일을 정하고 그 간사(幹事)를 뽑고 그 자금을 갹출하고 길지(吉地)를 점지함에 제일 좋은 자리를 찾기는 실로 쉽지 아니 하였고 비린내 나는 천지가 발급의 자취로 어지러워(6.25사변을 말함.) 고요하고 깨끗한 곳이 없었고 오직 화방사(花坊祠)의 한구간이 동천(洞天)이 고요하고 깊으며 광활 하면서도 아득하여 가히 설단 할만한 땅이었다. 화방사란 공의 후손 보승중랑장(保勝中郎將) 휘(諱) 영번(永蕃)과 해운(海雲) 휘 계명(季明) 그리고 격암(格庵) 휘(諱) 사고(師古) 삼공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아, 기맥(氣脈)이 상통하고 신령(神靈)의 척강(陟降)이 가까우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이 우연히도 서로 합일한 곳이니 하필 다른 곳을 구하리요. 또 그 산천형승(山川形勝)을 말한다면 동에는 구슬같은 파도가 넘실거려 하늘에 닿고 남으로는 왕피천(王避川)의 장강(長江)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고 좌우의 산봉우리는 자손들이 늘어서 있는 것 같고 앞뒤의 소나무와 삼(杉)나무는 병풍처럼 둘러서서 있으니 진실로 관동(關東)의 별천지로다.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풀은 베고 계단을 쌓고 돈대(敦臺)를 보축(補築)하니 숲과 산이 더욱 빛이 나고 물과 돌들이 더욱 채색을 더하였으니 소위 땅이 사람을 만나 비로소 명승지(名勝地)가 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비석이 다듬어 짐에 여러 종친들이 비석에 새길 비문(碑文)을 나에게 쓰라고 하니 스스로 돌아 보건데 90을 바라보는 노경에 진실로 감당키 어려운 일이나 숨(一息)이 붙어 있는 한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힘을 내어 붓을 드니 또한 말씀드릴 것이 있으니 단(壇)이 없다면 그만이지 있다면 향(香)을 피우고 조상을 사모함이 성묘하는 의식을 하는 것이 오직 조상을 잊지 않음이요, 잊지 않음은 조상을 높힘이요, 조상을 높임은 후손들을 독려(督勵)하는 것이니 후손이 된 자 능히 스스로를 독려할 줄만 즉 그 높여야 할 바를 더욱 높이고 사모할 바를 더욱 사모하여 장차 오래도록 더욱 잊지 않을 것이요. 만약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제사를 받들 때 향을 피우고 제물을 진설(陳設)함이 비록 고례(古禮)대로 한다고 한들 그것은 한갓 형식에 불과한 것이니 하물며 공산(空山)의 한 조각 비석을 무엇에 쓸 것인가. 오직 여러 종친들은 힘쓸지어다.
금번 이 석물(石物)에 소요된 자금은 후손 순식(順植)이 홀로 부담 하고 이어서 정광(政廣)이 또 큰 자금을 내어서 담장을 쌓는 비용과 제구(祭具)를 완전히 구비하니 청송(靑松)한파의 이 두사람은 어찌 그렇게도 장쾌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이 사람의 착한 일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훗날의 징신(微信)으로 삼는다 하였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우리 남씨는 당(唐)에서 발원하여 그 수(數)가 불억(不億:해아릴 수 없이 많음)이라
우리나라(槿域)에 빛이 났도다.
유덕(有德) 유도(有道)하고 또한 문장(文章)이라네.
적조보물(籍組紱輔:高官大爵을 말하며 옛날 임금의 大禮服치마에 꾸며놓은 )이 빛이나고 번창 하였네.
고려조에 이르러 삼형제 솔발같이 우뚝했네.
삼형제가 분관(分貫)하니 그 핏줄은 같도다.
천년을 지나도 친친(親親)하고 돈목(敦睦)했네.
천성(天性)에 근거하여 어느때나 힘썼고 존조(尊組)하고 존모(尊慕)함은 후손들의 책임이라네.
세월은 오래되고 상전벽해(桑田碧海)되어 묘소(墓所)를 실전하여 찾을 길이 없네.
봄 이슬 가을 서리(春露秋霜)에 첨소무지(瞻掃無地)하니 후손들의 쌓인 한이
모두의 의견으로 설단(設壇)을 하니 의기(義起)화합이라 인정으로 비춘 것이 신리(神理)의 자취리라.
그 자취는 오래이나 그 사적은 새로웠네.
우뚝솟은 화방산(花芳山)은 어이 저리 울창하고 아름다운 용머리요(亭亭螭首) 높고 높은 비석일세.
옛일을 우러러 보고 지금을 살펴보니 황연한 역세隔世)로다.
시공(始工)에서 종말(終末)까지 다행히도 완공했네.
고징(考徵)은 없다마는 주례(周禮)에는 합당하네.
산명(山明)하고 수려(水麗)하니 제수(祭需) 또한 풍요롭네.
이제부터 받드오니 오는 세월 무궁하리
나 혼자의 말이 아니라 순모(詢謨)가 같음일세.
명진년유두철(丙辰年流頭節:음력 6월15일)
후손 병기 삼가 지음(後孫 炳基 謹 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