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호공

만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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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jpg 조선 초기 동해의 수호자, 8세 만호공(萬戶公) 호()의 생애와 업적

 

가계와 학문의 기틀을 다지다

8세조 만호공(萬戶公) 호(顥)는 영양 남씨의 빛나는 가풍을 이어받아 무관으로서 국방의 중임에 헌신한 인물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영해 이씨(寧海李氏)로, 동정(同正)을 지낸 이춘무(李春茂)의 따님이다. 처조부는 호부전서(戶部典書)를 지낸 이성무(李成茂)의 아들인 이희익(李希益)이며, 처외조부는 이안린(李安麟)으로 당대의 명문가와 굳건한 혼맥을 맺어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공은 슬하에 구주(九疇)와 구경(九經)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형제가 모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공이 무관으로서 변방을 수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서도, 자녀들의 학문 정진을 소홀히 하지 않고 문무를 겸비한 명문거족의 기틀을 확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종조 울릉도 쇄환(刷還) 작전과 영토 수호

만호공의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재위 시절, 울릉도(鬱陵島) 정벌과 쇄환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이다. 조선 초기는 잦은 왜구의 출몰로 해안과 도서 지방의 피해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도서 지역의 백성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켜 보호하고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 혹은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시 해상 방어의 핵심 지휘관인 장군(將軍) 만호(萬戶)의 직책을 맡고 있던 공은 세종의 어명을 받들어 수군을 이끌고 울릉도 정벌에 나섰다. 험난한 뱃길과 거친 산세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여, 국역을 피해 섬으로 숨어들어 작당했던 김환(金丸)을 비롯한 도망자 무리를 모두 사로잡아 무사히 본토로 압송하고 섬을 비우는 중대한 공훈을 세웠다.

 

역사적 의의와 후세의 평가

이러한 공의 빛나는 전공은 조선 최고의 관찬 지리지인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세종조에 울릉도를 쳐서 김환 등을 모조리 사로잡고 그 땅을 비웠다(世宗朝伐鬱陵島盡俘金丸等空其地)"라는 기록으로 뚜렷하게 남아있다. 만호공의 울릉도 작전은 단순한 치안 유지를 넘어, 동해의 외딴섬인 울릉도가 조선의 굳건한 영토로서 행정력과 군사력 아래 놓여 있음을 안팎에 천명한 중대한 군사 행동이었다. 이는 훗날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영유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지대하다.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동해의 거친 파도를 가르며 영토를 수호한 만호공 호의 호연지기와 애국충절은, 오늘날 영양남씨 가문의 커다란 자랑이자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찬란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