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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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헌

 

mark1.jpg 8세 진무부위 록사공 휘 남계문 공 묘표 역문 (進武副尉南公諱啟文墓表)

 

먼 후손 진영(軫永)이 지음

선사군(仙槎郡 울진군의 옛 지명) 북쪽 소야리 중간산의 '베개가 해(亥)방향을 향하고 있는 언덕'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무덤은 바로 우리 먼 조상인 영양남씨, 벼슬은 진무부위(進武副尉)이고 이름은 계문(啟文)이신 분의 묘소다.

 

공은 신라의 영의공(英毅公)인 민(敏)을 조상으로 모시고, 여러 세대를 거쳐 위대한 홍보(洪輔)에 이르렀다. 홍보는 고려 왕조에서 벼슬하여 중대광(重大匡)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홍보는 위위주부(衛尉主簿)와 영동정(令同正)인 겸(謙)을 낳았고, 영동정은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인 숙손(淑孫)을 낳았으며, 예빈시경은 급제(及第)한 지탁(之卓)을 낳았다.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혁(奕)이며, 역시 검교예빈시경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승경(承敬)이며, 경전녹사(慶殿錄事)를 지냈다. 아버지의 이름은 의(顗)이며, 진사(進士)를 지냈다.

 

공은 조선 건국 초기에 예천에서 선사(仙槎), 즉 옛 울진으로 와서 자손이 점차 번성하여 이 고을의 명문가(望族)가 되었다. 공이 후손들에게 훌륭한 길을 열어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의 부인은 공의 묘에 함께 묻혔다. 공은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은 각(閣)으로, 문위현령(文義縣令)을 지냈다. 둘째는 한(閑)으로,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셋째는 윤(閏)이고, 넷째는 개(開)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다. 두 명의 딸은 진사인 이정실(李廷實)과 장재(張載)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로는 치인(致仁), 치의(致義, 승의부위), 치례(致禮)는 장남 각의 자손이고, 효원(孝元)과 효온(孝溫)은 둘째 한의 자손이며, 맹양(孟陽), 중양(仲陽), 계양(季陽)은 셋째 윤의 자손이고, 시형(始亨)은 넷째 개의 자손이다.

묘에는 예전에 묘비가 있었는데, 황림 윤공 사진(篁林 尹公 思進)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아마도 원래 기록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손인 상철(尚喆), 주옥(周鈺), 진중(鎮中)이 도원(道源)과 상숙(尚淑)과 함께 묘비명을 다시 새기기로 의논하고 저에게 글을 부탁했다. 제가 여러 번 거절했지만 허락을 얻지 못해 간략하게 공의 가계와 근원을 서술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옛것과 지금을 비교하여 몇몇 오류들을 수정했다. 그러나 구름과 안개가 가득해 하늘이 가려져도 본질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이러한 내용의 변경은 본래 공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공의 묘를 찾아 절하고 공의 업적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세월의 흐름과 사람 마음의 변화에 대해 슬픔을 느낄 것이다. 참으로 애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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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사공 묘역 (2001년 촬영, 울진군 북면 소곡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