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공 묘역

영의공 묘역

묘역 전경

묘 비

석 물

헌성비

지 도

 

mark1.jpg 시조영의공 묘비명(始祖英毅公 墓碑銘)

 

의령 후손 상철(宜寧 後孫 相喆)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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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조 영의공(英毅公)께서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이부상서(史部尚書)에 이르니 조정의 신하중에 덕이 크고(碩德) 중망(重望)이 공에 비견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천보(天寶) 40년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바다에서 태풍을 맞나 신라의 유린(有隣)땅 축산도에 닿으니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이다. 신라왕이 그 사실을 천자에게 알리니 조서(詔書:임금의 명령을 기록한 글)를 내려 말하기를 십생구사(十生九死)한 신하는 신하로 대하는 예로서 부를 수 없으니 마땅히 그가 살고자 하는 곳에 살도록 하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온 천하가 임금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니 머물러 살기를 원하였다. 그때 나이는 40여세요. 신라 경덕왕(景德王) 14년(서기755년)이다.

 

공의 본성은 김(金)씨요, 휘(諱)는 충(忠)이며 중국의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사람이다. 여남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로 사성하고 이름은 민(敏)으로 바꾸고 식읍(食邑)으로 영양현을 내리고 사후에 영의(英毅)라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후 후손들이 나라에 세운 공로(功勞)로 분봉(分封)되어 비로소 의령(宜寧) 고성(固城 ) 삼관(三貫)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고려조(高麗朝)의 인재가 많이남과 덕학(德學)과 공업(功業)의 높았음은 역사에 기록 되었으며 이씨 조선에 이르러 그 명성이 크게 빛나 도학(道學) 문장(文章) 충효(忠孝)및 절의(節義)를 지킨 선비와 유명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수목이 우거지듯 뒤를 이어서 우리나라의 명문대족(明門大族)이 되었음은 모두 공의 덕(德)과 복(祚)이 후손에게 끝없이 끼친 덕택이 아니겠는가.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이 편찬한 해동인물총기(海東人物叢記)에 기록하기를 당나라 황제가 신라 왕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영의공을 왕의 좌우에 두고 자문(咨問)케하여 중국의 문물을 전하게 하고 정무(政務)를 의논하고 인륜을 밝히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임금에게 드렸다고 하였다.

 

nam3_1_2b-2.jpg그 자취를 살펴보면 축산도(丑山島)에 이부동(吏部洞) 통사동(通使洞)이 있으니 이는 공의 관함(官啣)에 따라 이름 붙여진 동명이며 망향대(望鄉臺)와 망제단(望祭壇)이 있으니 이는 공이 때때로 오르내리며 떠나온 고국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고 조상의 묘를 향해 망제(望祭)를 올림으로 붙여진 이름이요, 일광대(日光臺)와 월영대(月影臺)는 좋은 날과 달 밝은 밤에 회포를 달래던 곳으로 이름이 붙여졌고, 절부총(節斧塚)이라는 곳은 절월(節鉞: 節은 조그만한 手旗이고 鉞은 도끼 모양인데 軍令을 어긴 자에게는 生殺權을 상징함)을 묻은 곳이라 한다.

 

혹 절벽을 깎아 글을 새기고 혹은 비석을 세워 표시를 하였으나 공의 생졸년월일은 알 수 없으며 다만 묘가 영양 일월산(日月山) 부용봉(芙蓉峰)의 아래쪽 도항구의 임원(壬坎原)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세대가 오래되고 세상이 여러 번 바뀌어 묘의 확실한 위치를 모르므로 지난 현종(顯宗) 경술년(1670년)에 후손 상주(尙周)가 경향각지의 종친과 함께 묘지(墓誌)를 파내어 확증을 얻기 위하여 일을 시도하다가 갑자기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짐에 놀래어 그만두었더니, 숙종(肅宗) 을묘년에(1675년) 후손 금일(金一)이 묘의 서쪽 기슭에 설단하여 매년 제사를 모시고 그후 3년이 지난 정사년(1678년)에 고을 선비들이 서원(書院)을 창건하여 춘추로 제사를 받들었더니, 무진년에 나라의 명령으로 서원을 철폐하니 후손들의 한이 더욱 깊어졌다. 원근(遠近)에 사는 자손들이 때로 언덕에 올라 슬퍼하며 방황하기 천년의 세월이 하루 같았다.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심으로부터 일어나는 고로 다시 표석(表石)을 찾으려고 때때로 논의하였으나 일이 대단히 어렵고 중대하여 일이 감히 경솔하게 시작하지 못하였더니 지난 무술년(1958년) 봄에 3파의 대동보가 완성되니 이는 우리 남씨 최초의 쾌거였다. 이 기회에 상철(相喆)이 여러 종인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일을 시작하니 하늘에서 또 다시 가랑비가 내리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여러사람이 허둥지둥 하는지라 상철이 말하기를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그만둘 수는 없다 하고 무덤 앞을 몇일을 파니 큰 석곡(石槨)이 나타났다.

 

이 석곽은 신라시대의 옛 제도로 이 지역내에 다른 왕공(王公)의 장지(葬地)가 있다고 들어 본적이 없으니 공의 진택임에 의심이 없다 슬프도다. 천년 동안이나 이루지 못한 일을 하루 아침에 저 세상과 이 세상의 감회를 푸니 이는 조상님의 내심이요 자손들의 행운이다.

 

묘소에 석물(石物)을 세우려고 의논할 때 밀직공파 영양후손(密直公派英陽後孫) 정섭(貞燮)이 자진하여 백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출연(出捐)하고 그 나머지 비용은 모든 종친이 각자 갹출하여 많은 기금이 모이니 어찌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호라 동해가 마르지 않고 영산(英山)이 우뚝 솟고 가파르구나 생각건대 공의 혼백이 태산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어 자손을 보우(保佑)하고 은혜를 끼쳤던 것인가. 제 묘역에 비석을 세우면서 비문을 당연히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에게 받아 공의 숨겨진 행적을 밝혀야만 옳으나 혹 어떤 분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의 사적이 높고 또 높으나 천년이 넘는 동안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숨겨지고 물음은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니 지금에 와서 과장(李張)하지 않는 이 옳치 않겠는가 라고 하기도하고 또 어떤 은 그렇지 않고 글이 아니면 옛일을 고찰하여 뒤 세상에 전하여 믿게(證信)할 수 없으니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하니 이에 하진(厦鎭) 상찬(相讚) 명수(秉燧)가 나 상철로 하여금 비문을 쓰라고 하니 가만히 생각 하여 보건데 아득히 먼 천년 전의 일을 그 실마리를 찾기조차 망망하고 공의 깊은 학문과 높은 행적이 국가에 공헌했고 그 덕이 백성에게 미쳤으나 사실을 고증할 수 없어서 삼가 족보에 수록된 기록과 여러 사람의 저술한 글을 토대로 하여 비문을 기록하니 그 일이 장황하고 깊으며 오묘 하기도 하다.

 

공의 자손이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나 한조각의 비석에는 번잡하여 파(派別)로 기록하지 못하고 관직(官)의 현달 함과 도학(道學)과 문장이 뛰어나고 임야에 숨은 사람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하는 것이 옳은 일이나 또한 너무 지나침으로 기록하지 않으니 참람하고 망령된 죄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빛나도다. 우리 시조 당나라에서 기틀을 잡으셨네

바다와 태산같이 정기는 뭉쳤고 해님 달님같이 함께 빛나네.

재질은 전대(專對)의 임을 맡을만하여 천자의 명을 받들었네.

먼 곳의 안렴사로 언행(言行)이 충경(忠敬)하니 당당한 한(漢)나라 사신이요.

사해(四海)는 풍화에 따랐도다. 일엽편주로 만리길을 헤매었노라。

고국은 있건만 몸은 없으니 도룡도 깔고 앉았으며 고래에도 채찍질 하였네.

마땅히 경륜을 펼쳐 온누리(八荒)를 편 것이로되 파도에 부딪치고 중국에는 난리가 일어났으니 초(楚)나라의 시작됨과 오(吳)나라 같으니 갈 곳이 없네.

머리카락 같은 한국땅이(鯷岑) 구름 밖으로 바라 보이네.

공자(孔子)의 살고저하던 땅이고 기자(箕子)의 옛 터전이다.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은 높고도 깊으도다.

왕도(王土)가 아닌 곳이 없으니 삶이 마음도 편하네.

예로서 빈사(賓師)로 접대하니 신라 경덕왕이다.

작(爵)을 주고 사성하고 식읍(食邑)도 내리셨네.

인간세상 어느 때인고 천보년간의 난리 때로다.

당나라의 운명 다하여 황제는 촉(蜀)으로 달아났네.

머나먼 해외에서도 향내를 끼쳤네. 망향대는 높고 제단은 빛나도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천여년이 지났도다.

수 많은 자손들이 경향(京鄉)에 흩어져 사네.

문장도 있고 무(武)도 있으며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었다.

도학은 대대로 이어지고 충효는 역사에 기록되네.

대대로 이어져서 나라의 기둥되네.

누구가 시조(始祖)인고 영의공(英懿公)이라 이르더라.

빛나도다. 영의 공은 사직(社稷)에 공이 있고 남긴 유덕 불멸(不滅)하니 벽해(碧海)의 서광이로다. 축산도에 닻줄을 매니 그 푸르름은 끝이 없네 근원이 넓으면 흐름은 크고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는 무성하네.

용봉 아래요. 도항동의 동쪽에 옛날 의관을 묻었으나 여러 번 난리를 겪은지라.

보책과 구전(口傳)이 이곳애 있다하니 이제 파서 증험하여 진택을 알았노라.

빛나고 빛나는 지난 자취는 푸른 하늘이 준 믿음일세.

천추만세(千秋萬歲)에 빛나고 빛나리。

내가 좀스럽게 명(銘)을 지어 끝없이 보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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