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씨 발상지 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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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씨 시조영의공 유허비 |
남씨 시조영의공은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산20-2번지 내에 위치해 있으며 구 유허비와 새로 만든 유허비가 나란히 서있다.
구 유허비는 1798년 해수면 바위에 처음 건립하였고 이후 1973년 현 위치로 이전하며 신비를 제작하여 같이 세웠다.
2014년 중수사업을 통해 새로운 면모로 현재의 유허비 위용이 갖춰졌으며 더불어 축대공사는 물론이고 입구에 남씨발상지 표지석도 함께 설치했다. 그리고 뒤로는 영양김씨 시조공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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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영의공 유허비음기명 (始祖英毅公遺墟碑陰記銘) |
후손 대제학 공철 지음(後孫大提學公轍撰)
남씨의 본관이 셋으로 영양 의령 고성이니 모두 영의공을 시조로 하니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분봉(分封)을 하여도 같은 뿌리인 주(周)나라에서 나온 것과 같다. 그 후세에 신라와 고려를 거쳐 이제 천여년이 지났다.
영의공의 휘(諱)는 민(敏)이요 초명은 충(忠)이며 성은 김씨이니 여남(汝南)사람이다.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안렴사(按廉使)로 천보(天寶) 14년에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태풍을 만나 신라의 유린(有隣)땅에 표박하였다. 공이 그곳에 살기를 원하니 경덕왕(景德王)이 천자(天子)에게 아뢰니 천자가 허락하거늘 신라왕이 공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로 사성하여 영의공으로 봉하고 영양현으로 식읍(食邑)을 삼게 하니 그로 인하여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휘 익(翼)이라는 분은 영양에 습봉(襲封)되고 그후에 또다시 의령 고성으로 분봉되어 드디어 삼관(三貫)이 되었으며 덕업(德業)과 문장의 선비들이 우연히 뒤를 이으니 그 번성함이 비할 데가 없도다.
도지(圖誌)를 살펴보면 유린 땅은 처음 진한(辰韓)에 속했다가 지금은 영남의 영해부이다. 부의 동쪽 10리에 흑산도가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이 이곳에서 하선(下船)하였다하고, 이부동(吏部洞) 통사동(通使洞)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이
여기에다 집을 지었다 하고, 또한 망제단(望祭壇)은 공이 고향을 떠나 부모의 묘소로부터 만리 타국에서 시절(時節)로 망제를 올려 쓸쓸함을 달래던 곳이 이곳이다. 망향대(望鄉臺)는 공이 비록 소국에서종사하나 하루도 고국인 당(唐)나라를 잊지 못하는 고로 산에 올라 멀리 중국의 산천을 바라보고 개연히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이 고향 생각에 잠기던 곳이 또한 이곳이다.
공의 벼슬한 사적은 역사에 기록이 없고 이 모두가 후세의 전설에서 나온 말이나 그러나 남씨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곳이니 공의 평생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의 백분의 한둘이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니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는가?
공자는 성인이 일찍이 동이(東夷:朝鮮땅을 말함)에서 살고 싶다 하였으니, 천보년간의 난이 극에 달하였고 현종(玄宗)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어 정사는 거칠고 양국충(楊國忠)이 귀비(貴妃)와 더불어 정사를 그르치니 사대부가 벼슬길에 나서기를 싫어하였고 안록산이 모반하여 황제는 촉(蜀)으로 달아나니 서남 강해지간(江海之間)이 연이어 병란이 일어나서 여러 제후의 나라들이 공헌(貢獻)하는 길마저 두절되었으니 공이 신라에 거류하여 돌아가지 않음이 성인의 뜻을 사모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겠는가.
옛날 천자가 건덕(健德:王位에 오름을 말함)함에 출생한 곳을 따라 성하니 순(舜)임금이 규예(潙汭)를 연유한 고로 규씨(潙氏)로 진습(陳襲)한것과 우(禹)임금에게 토성(土姓)을 준것과 같은 것이다.
제후(諸侯)는 사성하고 일족(一族)을 명할 수 없으나 춘추(春秋)시대인 은공(隱公)8년에 무해(無駭)가 죽자 우부(羽父)가 시호(諡號)와 사성(賜姓)을 청하거늘 중중(衆仲)이 말하기를 벼슬함에 세공이 있으면 관족(官族)이 있고 세읍(世邑)또한 이와 같다 하니 청컨대 구관(舊官) 구읍(舊邑)의 명칭을 따서 사성을 하라고 하였다 하니 그렇다면 이 왕으로 부터 성(姓)을 받은 것은 구읍(舊邑)으로 인하여 받은 뜻이며 천자(天子)가 허락한 것이니 천자가 식읍을 주고 사성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왕이 감히 스스로 전하지 못하는 것은 예(禮)가 있어서 이고 천자에게 청하여 명(命)을 받았음은 더욱 빛이나는 것이니 이는 후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다.
이에 영해에 사는 종인들이 서로 의논하여 돈을 모으고 공의 유허비를 세울 것을 계획하여 척추(僉樞) 경택(景宅)과 유학(幼學) 경열씨(景烈甫)가 일(一運)에게 서찰을 주어 천리길을 달려와서 공철(公轍)에서 글을 부탁하니 첨공들의 추원(追遠)하는 정성이 두텁다.
드디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오른편과 같이 이 글을 쓰느라.
대개 당나라가 망한 후 오대(五代)가 작란(作亂)하여 50년 후에 송(宋)나라가 일어나고 또 300년이 지나서 원(元)나라가 되고 또 80년이 지나서 명(明)나라가 일어서고 또 200년 후에 청(淸)나라가 되었다.
중국의 사대부(士大夫)와 군자(君子)들은 머리를 깎고 옷깃을 돌려 입은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오직 남씨는 동방(東方)에 살면서 시서(詩書)를 외우고 예악을 논하면서 의관(衣冠)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 모두 영의공이 남기신 유택이로다. 아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명(銘)하여 말하노라.
빛나도다 남씨여 당(唐)에서 터전이 비롯되었네.
덕업(德業)과 공훈(功勳)도 있고 또한 문장도 있네.
신라를 거쳐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
관면(冠冕)과 규장(圭章)의 좋은 영예 밝기도 하여라.
어느 분이 시조인고 영의공이 시조로다.
영의공께서는 남쪽에서 오시었네.
때는 천보(天寶)년간이요 황제께서 촉(蜀)에 계셨네.
바닷길 만리에서도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네.
공께서 말씀하길 천하는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 했네.
신라의 옷을 입고 당나라의 예를 행함은
노(魯)나라의 옷을 입고 주국(周國)의 예를 행함이라.
머리 숙여 명(命)을 청해 신하되길 원하였네.
왕이 말하기를 먼 중국 사람을 내 어찌 마음대로 할소냐.
천자에게 주청하여 벼슬을 내리시고 식읍(食邑)주고 사성하여
이 땅에서 살게 하여 자손을 보존했네.
그 자손 창성하고 빛이 나니 영양과 의령 고성이로다.
당나라 뒤를 이어 원나라 청나라로 변하면서
중국의 땅(赤縣神州)은 비린내나는 전장(戰場)으로 변하였고
농서와 강 왼쪽은 이제 모두 오랑캐가 되었으나,
홀로 우리 남씨만은 의관(衣冠)의 문벌(門閥)일세.
문무(文武)양반(兩班)에서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됐네.
천년을 넘기면서 태평(太平)을 누렸으니
자손의 경사들은 선조에서 내리셨네.
영해의 동쪽에는 도산(島山竹島)이 길이 푸르도다.
공이 처음 오실 때의 뱃노래가 들리는 것 같구나
산도 때론 마멸되고 물도 때론 소진하니
수천년 이후에 그곳을 잃을까봐
내 비록 용열하나 명(銘)을 지어 길이 영예(令譽)를 전하노라.

영양김씨 시조 당안렴사 김공 유허비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