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문중별 족보 보고대회 영양남씨 족보현황서 발표 및 자료 수록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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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문중별 족보 보고대회 (2026년 10월 2일) 영양남씨 족보현황서 발표 및 자료 수록 내용
영양남씨 족보현황
차례
Ⅰ. 영양남씨(英陽南氏) 기원과 발전
Ⅱ. 족보 간행 통사(通史)
Ⅲ. 족보별 세부 현황
Ⅳ. 맺음말
Ⅰ. 영양남씨(英陽南氏) 기원과 발전
1.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 및 본관(本貫)의 유래(由來)
가. 시조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에 관한 전승(傳承)
영양남씨를 비롯한 남씨(南氏) 제관(諸貫)은 영의공 남민을 공동 시조로 한다. 족보 서문(序文)과 유허비문(遺墟碑文) 등 문중 전승(傳承)에 따르면 그의 본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당(唐) 현종(玄宗) 연간에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냈다고 한다. 일부 기록은 그 직임을 안렴사(按廉使)로 전한다.
전승은 그의 동래(東來) 시점을 신라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으로 특정한다. 당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하던 중 풍랑(風浪)을 만나 표류(漂流)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죽도(竹島) 해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경덕왕은 그가 중국 여남(汝南) 출신인 점을 들어 남(南)을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주었으며, 뒤에 영의공의 시호(諡號)와 영양현(英陽縣)의 식읍(食邑)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 영양현이 곧 영양남씨 본관(本貫)의 지리적 근간이다.
나. 사료 검증
위 서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한 현전(現傳) 관찬(官撰) 사료(史料)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문헌적 근거는 조선 후기 이후의 여러 족보 서문, 『영의공실기(英毅公實記)』, 1798년(정조 22년) 건립된 영의공 유허비 비문 등 후대 자료에 한정된다.
다만 영덕 축산(丑山) 일원에는 이부동(吏部洞), 통사동(通使洞), 망향대(望鄕臺), 망제단(望祭壇), 일광대(日光臺), 월영대(月影臺) 등 시조 전승과 직결되는 지명(地名)과 표지(標識)가 현전(現傳)한다. 이는 해당 전승이 장기간 지역 사회에 정착, 전수되었음을 보여 주는 방증(傍證)이다.
다. 중시조(中始祖)와 분관(分貫)
고려 후기 남홍보(南洪輔)·남군보(南君甫)·남광보(南匡甫) 3형제를 각 본관이 갈라지는 기점으로 보는 것이 남씨 삼관(三貫)의 공통 인식이다. 장남 홍보는 영양(英陽), 차남 군보는 의령(宜寧), 삼남 광보는 고성(固城)을 각각 본관으로 하여 중시조가 되었다. 다만 3형제의 세대(世代) 위치와 상호 관계는 판본(板本)에 따라 기록이 일치하지 않으며, 1993년 계유대동보(癸酉大同譜)는 이견(異見)을 수권(首卷)에 병기(倂記)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영양남씨는 남홍보를 중시조 겸 1세조(一世祖)로 한다. 그는 고려조에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중대광(重大匡)을 역임하였다고 전하며, 그 근거는 족보와 금석문(金石文)에 있다.
2. 계통(系統)과 분파(分派), 세거지의 분포
영양남씨의 보첩은 중대광공파(重大匡公派)와 밀직공파(密直公派) 두 계통을 축으로 전승되어 왔다. 중대광공파는 중시조 홍보(洪輔)를 1세조로 하며, 영해·영양·울진 일원에 세거하였다. 밀직공파는 안동을 중심으로 세거한 계통으로, 그 상계(上系)는 밀직공 군보(君甫)이며 의령관과 같은 중시조이다. 그러나 영양(英陽)을 본관으로 하여 세보를 지속적으로 간행하여 왔으므로 본 현황서의 서술 범위에 포함한다. 두 계통은 1810년 경오보에서 처음 합보를 이룬 이래 경인보까지 합보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상계와 세계(世系)에 관한 이견은 1993년 계유대동보에서 각 파의 주장을 병기하는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중대광공파는 1세조 중대광공으로부터 2세조 휘 겸(謙), 3세조 휘 숙손(淑孫), 4세조 휘 지탁(之卓), 5세조 휘 요(堯), 휘 혁(奕), 휘 삼기(三起)로 이어지고, 6세조 대에 이르러 휘 승경(承敬)은 록사공파의 상계(上系)가, 휘 승고(承顧)는 만호·현감·반송·송정 네 파의 상계가, 휘 봉우(鳳羽)는 수사공파의 상계가 되었다.
가. 록사공파(錄事公派) : 파조는 공민왕 때 영경전녹사를 지낸 남계문(南啓文)으로, 승경의 손자이다. 주로 경상북도 울진군에 세거한다.
나. 만호공파(萬戶公派) : 파조는 남호(南顥)로, 세종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이 파는 울진군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조선 중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예언가인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가 이 파의 후손이다.
다. 현감공파(縣監公派) : 파조는 남이(南頤)로, 세종 때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역임하였다. 울진군·경주시·봉화군 등지에 후손들이 세거한다.
라. 반송공파(攀松公派) : 파조는 남영(南領)이며, 경상북도 울진군과 울릉군에 주로 세거하였다.
마. 송정공파(松亭公派) : 파조는 남수(南須)로, 세종 때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이 파는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울진·경주·영덕·예천·영양·문경·청송 및 대구광역시, 강원도 삼척 등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바. 수사공파(水使公派) : 파조는 남희(南禧)로, 가선대부 수륙병마절도사(嘉善大夫 水陸兵馬節度使)라는 중책을 역임한 남득량(南得良)의 맏아들이다. 경주시와 강원도 강릉시·고성군 등지에 세거한다.
Ⅱ. 족보 간행 통사(通史)
1. 초간보(初刊譜)부터 현대 간행본까지의 편찬 통사
영양남씨의 족보 편찬은 조선 후기에 본격화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차의 증보(增補)와 간행(刊行)을 거듭하였다. 남씨 계보를 체계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6세기 중엽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에 의한 것으로 전하나, 이때 편찬되었다는 울평보(蔚坪譜)는 현전하지 않아 그 체제(體制)를 확인할 수 없다.
17세기 초 밀직공(密直公) 후손 남융달(南隆達, 1565년~1652년)이 1622년(광해군 14년) 안동(安東)에서 임술보(壬戌譜) 편찬을 도모하였다. 그 작업은 아들 남자(南磁, 1601년~1683년)에게 이어져 1680년경 일단락되었으나 간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약 30년 뒤 남천호(南天浩, 1635년~1716년) 등이 1712년(숙종 38) 안동 남흥재사(南興齋舍)에서 임진보(壬辰譜)를 3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으로 간행하니, 이것이 현전하는 최초의 체계적 간행본이다.
한편 영해(寧海)를 중심으로 한 중대광공파(重大匡公派)는 1727년(영조 3년) 정미보(丁未譜)를 간행하였다. 이는 현전하는 중대광공파 최초의 간행본으로, 울평보의 계통 인식을 계승하였다.
〔표 1〕 영양남씨 족보 간행 연대순 총괄 목록
| 간행연도 | 간행본명 | 발행주체 | 비고 |
| 16세기 중엽 | 울평보( 蔚坪譜 ) | 중대광공파 | 중대광공 후손 격암( 格庵 ) 남사고( 南師古 ) 편찬, 현전하지 않음 |
| 1622 | 임술보( 壬戌譜 ) | 밀직공파 | 2대에 걸쳐 편찬, 미간행 |
| 1712 | 임진보( 壬辰譜 ) | 밀직공파 | 현전하는 밀직공파 최초 족보 |
| 1727 | 정미보( 丁未譜 ) | 중대광공파 | 현전하는 중대광공파 족보 |
| 1765 | 을유보( 乙酉譜 ) | 밀직공파 | 상계( 上系 )와 세계( 世系 ) 논쟁 촉발 |
| 1810 | 경오보( 庚午譜 ) | 양파 합보 | 최초 양파의 합보( 合譜 ), 족보의 체계적 정비 |
| 1855 | 을묘보( 乙卯譜 ) | 양파 합보 | '경오보 속편( 續編 )' 형식으로 간행 |
| 1890 | 경인보( 庚寅譜 ) | 양파 합보 | 세 번째 합보 발간, 통합 정신의 계승 |
| 1934 | 갑술보( 甲戌譜 ) | 중대광공파 | 일제강점기, 단독 족보 간행 |
| 1938 | 무인보( 戊寅譜 ) | 밀직공파 | 단독 족보 간행 |
| 1957 | 정유 대동보( 丁酉大同譜 ) | 삼관( 三貫 ) 남씨대종회 | 남씨 각 파의 족보 단일화 염원, 첫 남씨대동보 탄생 |
| 1979 | 기미보( 己未譜 ) | 영양남씨 대종회 | 세계( 世系 ) 문제로 인한 영양남씨의 대동보 미참여, 단독 세보 간행 |
| 1993 | 계유 대동보( 癸酉大同譜 ) | 삼관( 三貫 ) 남씨대종회 | 각종 논쟁 사안의 현실적 타협, 대동보 재탄생 |
| 2026 | 디지털 족보( 丙午譜 ) | 영양남씨 대종회 | 계유보를 근간으로 디지털 족보 구축, 2026년 말 완료 예정 |
2. 시대적 전환기별 수보(修譜) 배경
영양남씨의 수보는 세 차례의 큰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다.
첫째는 양란(兩亂) 이후의 종법(宗法) 정착기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며 문서와 계보(系譜) 자료가 산일(散逸)되자, 17세기 초부터 계보를 문자로 고정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1622년의 임술보 기도와 1712년 임진보 간행, 1727년 정미보 간행이 모두 이 흐름에 속한다.
둘째는 18~19세기의 계통 정비기이다. 1765년 을유보는 「5세 삼기(三起) - 봉우(鳳羽) - 득온(得溫)·득량(得良)·득공(得恭)·득검(得儉)」의 계보를 밀직공파(密直公派) 소속으로 기재하였고, 당대에 이미 위서(僞書)로 지목되던 「영양남씨보선계고적(英陽南氏譜先系古蹟)」을 수록하였다. 이는 이후 장기간에 걸친 세계(世系)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1810년 경오보에서 중대광공파와 밀직공파가 최초로 합보(合譜)를 이루면서 해당 계보는 중대광공파로 환원(還元)되었고, 「선계고적」은 이후 180여 년간 어느 간행본에도 재수록되지 않았다. 1855년 을묘보는 경오보에서 누락된 자손록(子孫錄)을 보완한 속편(續編)이며, 1890년 경인보는 세 번째 합보이다.
셋째는 근현대의 통합 시도기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합보가 성사되지 못하여 1934년 갑술보(甲戌譜)와 1938년 무인보(戊寅譜)가 각각 단독 간행되었다. 1957년 정유 대동보는 영양관 중시조 홍보, 안동·의령관 중시조 군보, 고성관 중시조 광보를 각각 1세로 삼는 방식을 채택하여 삼관 통합을 이루었으나, 편찬 과정에서 수사공파(水使公派) 계보의 귀속을 둘러싼 이견이 재연(再燃)되어 해당 계통이 대동보에서 누락(漏落)되었다.
1979년 기미 대동보(己未大同譜) 편찬 시에도 같은 쟁점이 해소되지 않아 중대광공파는 별도로 기미보(己未譜)를 간행하였으며(세보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문중은 대동보에 등재), 그 문헌록(文獻錄)에 대동보 미참여와 이계(移系) 문제에 관한 경위가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수십 년에 걸친 이 격렬한 논쟁은 시간이 흐른 뒤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이하였다. 1993년에 편찬된 계유보(癸酉譜)에서는 1979년 중대광공파가 마지막으로 제시했던 현실적 타협안, 즉 득온(得溫)과 득량(得良)의 후손은 중대광공파로, 득공(得恭)과 득검(得儉)의 후손은 밀직공파로 각자의 뜻에 따라 소속을 정하는 방안이 실제로 적용되어 출간되었다. 이는 오랜 명분 싸움 끝에 결국 분파의 현실을 인정하고 각자의 역사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갈등이 봉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각 파의 견해를 병기(倂記)하는 방식은 향후에도 추가 검토의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Ⅲ. 족보별 세부 현황
1. 1712년 임진보(壬辰譜)
임진보는 현전하는 영양남씨 최초의 체계적 간행본이다. 편찬 과정에서 안동(밀직공파) 측과 의령남씨(宜寧南氏) 사이에 중시조 군보(君甫)의 후손 관계를 둘러싼 인식차가 있었다. 이는 해당 계통의 상계가 출발 단계에서부터 확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2. 1727년 정미보(丁未譜)
중대광공파의 실질적 첫 간행본으로, 실전된 울평보의 계통 인식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편찬되었다. 조선시대 호적(戶籍)과 장인숙적(張仁淑籍) 등 관(官) 기록을 등재의 근거로 활용한 점이 확인된다.
| 임진보(壬辰譜) | 임진보(壬辰譜) | 정미보(丁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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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2년 · 표지 | 1712년 · 권1 첫 면 | 1727년 · 첫 면 |
〔도판 1〕 임진보(1712년)와 정미보(1727년)
3. 1765년 을유보(乙酉譜)
밀직공파 단독 간행본이다. 「5세 삼기-봉우-득온·득량·득공·득검」의 계보를 밀직공파 소속으로 기재하여 이후 세계 논쟁의 발단이 되었으며, 수권에 「영양남씨보선계고적(英陽南氏譜先系古蹟)」을 수록하였다. 이 문헌은 남두채(南斗彩) 가문의 가첩(家牒)을 전사(轉寫)한 것으로, 간행 전후에 이미 그 내용의 허구성(虛構性)이 지적된 자료이다. 보첩사(譜牒史)적으로 볼 때 「선계고적」은 1712년 임진보에도, 1727년 정미보에도 수록되지 않았고, 1810년 경오보 이후 1993년 계유대동보에 이르기까지 어느 간행본에도 재수록되지 않았다. 단일 간행본에만 1회 수록되고 전후 260여 년간 배제된 사실 자체가 해당 문헌의 사료적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4. 1810년 경오보(庚午譜)
중대광공파와 밀직공파가 최초로 합보(合譜)를 이룬 간행본이다. 두 파가 모두 영양을 본관으로 하였고, 세거지가 지리적으로 인접하였던 점이 합보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간행본에서 삼기 이하의 계보는 중대광공파로 환원(還元)되었고 「선계고적」은 수록되지 않았다. 이로써 상계(上系)에 관한 이견은 일단 정리되었다. 45년 만에 이전 간행본의 기재를 수정한 사례로서, 후대 대동보 성립의 선례(先例)가 되었다.
| 을유보(乙酉譜) | 경오보(庚午譜) | 을묘보(乙卯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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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5년 · 표지 | 1810년 · 표지 | 1855년 · 속편 권4 표지 |
〔도판 2〕 을유보(1765년)·경오보(1810년)·을묘보(1855년)
5. 1855년 을묘보(乙卯譜) 및 1890년 경인보(庚寅譜)
을묘보는 경오보 편찬 시 누락된 자손록을 증보한 속편으로 간행되어, 경오보 3권과 합하여 총 21책의 체계를 이루었다. 경인보는 양 파의 세 번째 합보로서 경오보 이래의 계보 기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러한 합보의 경험은 훗날 남씨대동보 간행에 큰 영향을 주었다.
6. 1934년 갑술보(甲戌譜) 및 1938년 무인보(戊寅譜)
일제강점기의 상황에서 합보가 성사되지 못하여 중대광공파는 1934년에, 밀직공파는 1938년에 각각 단독으로 간행하였다. 두 간행본 모두 「선계고적」을 수록하지 않았다.
7. 1957년 정유 대동보(丁酉大同譜)
남씨 각 파의 족보를 단일화하려는 시도가 처음으로 결실을 맺은 간행본으로, 영양관 중시조 홍보, 안동 밀직공파·의령관 중시조 군보, 고성관 중시조 광보를 각각 1세로 삼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편찬 과정에서 영양남씨의 삼기 이하 계보의 귀속을 둘러싼 논쟁이 재연되었고, 그 결과 수사공파(삼기-봉우-득량-희)가 대동보에서 누락되었다. 또한 단일화를 우선한 결과 상계와 세계(世系)의 기재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여러 문중의 반발을 낳기도 하였다.
| 정유보(丁酉譜) | 기미보(己未譜) | 계유보(癸酉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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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 권2 표지 | 1979년 · 상권 표지 | 1993년 · 권1 표지 |
〔도판 3〕 정유대동보(1957년)·기미보(1979년)·계유대동보(1993년)
8. 1979년 기미보(己未譜)
기미 대동보 편찬 시에도 수사공파 계보 문제가 해소되지 않아, 중대광공파는 대동보 참여 대신 별도로 『영양남씨세보』(己未譜)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밀직공파와 중대광공파 일부 문중은 기미 대동보 편찬에 참여하여, 문중 내부의 분열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기미 대동보에는 안동(밀직공파)으로의 이계(移系)를 거부한 수사공파(삼기-봉우-득량-희)가 밀직공파 후손으로 임의 등재되어 해당 문중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기미세보의 문헌록에는 이계 문제에 관한 경위와 당시 제기된 논거가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세계 논쟁의 전개를 확인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도판 4〕 기미 대동보(1979년) | 기미 대동보(己未大同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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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 권1 표지 |
9. 1993년 계유 대동보(癸酉大同譜)
상계에 관한 이견을 상호 인정하되 수권에 각 파의 주장을 함께 수록하는 방식으로 논쟁을 정리하였다. 쟁점 계보는 「득온·득량은 중대광공파, 득공·득검은 밀직공파」로 분리 등재되었다. 다만 합의에 이르지 못한 세계(世系)의 기재를 각 관(貫)과 파(派)의 주장대로 병기함에 따라, 단일한 계보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이 간행 당시부터 제기되기도 하였다. 영양남씨의 자손록은 중대광공파 1~3권, 밀직공파 4~6권으로 편성되었으며,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족보 편찬의 기준보(基準譜)이다.
10. 디지털 족보(丙午譜) 구축과 보존관리 현황
영양남씨 대종회는 2022년 디지털 족보 구축 사업에 착수하여, 계유 대동보를 기준보(基準譜)로 삼아 그 이후 30여 년간 등재되지 못한 자손록을 증보하고 있으며, 2026년 말 1차 구축 완료를 목표로 진행 중이다.
이 사업은 자손록의 전산화에 그치지 아니하고, 구보(舊譜)의 수권(首卷)과 자손록을 영인(影印)하여 열람에 제공하는 보존관리 기능을 함께 갖춘다. 구축 범위는 다음과 같다.
· 디지털 자손록 : 계유 대동보를 기준으로 한 인명 자료, 조건별 검색과 파별·가계별 요약 열람 제공, 온라인 등재신청(수단)을 통한 상시 증보 체계 구축
· 구보 서고(舊譜書庫) : 정미보·경오보·을묘보·경인보·갑술보·정유보·기미보·계유보 등의 영인본(影印本)
· 문헌록 서고 : 구보별 범례(凡例)·서문(序文)·발문(跋文)·변론(辨論) 등 문헌록의 원문과 번역문
· 금석문 및 유적 자료 : 시조·중시조·파조 및 지파의 금석문(金石文)과 편액(扁額)의 원문·번역문, 묘역 사진 및 위치 정보
자료의 구축과 관리에는 진본성(眞本性)·무결성(無缺性)·보존성(保存性)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촬영 원본은 보정 없이 보존하고 열람용 사본을 별도로 두며, 분산 보관을 통하여 멸실에 대비한다. 2027년 상설 기구인 디지털 자산 관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이 체계를 영구 관리로 이관할 예정이다.
Ⅳ. 맺음말
영양남씨의 보첩은 1712년 임진보 이래 300여 년에 걸쳐 단절 없이 이어져 왔으며, 그 사이의 간행 기록·논변·수정 경위가 각 간행본의 수권과 문헌록에 문자로 남아 있다. 이 점이 영양남씨 보첩군(譜牒群)이 지니는 기록유산(記錄遺産)으로서의 특징이다.
첫째, 진정성의 측면이다. 1765년 을유보의 계보 기재와 「선계고적」 수록, 1810년 경오보의 환원, 1957년 정유 대동보에서의 누락, 1979년 기미보의 분리 간행, 1993년 계유 대동보의 분리 등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쟁점이 260여 년에 걸쳐 제기·검증·수정되는 과정이 간행본마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는 계보 기록이 고정된 산물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료 비판(史料批判)의 대상이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둘째, 시간성과 장소성의 측면이다. 양란 이후의 종법 정착, 18~19세기의 계통 정비, 일제강점기의 단독 간행, 광복 이후의 통합 시도라는 각 시대의 조건이 수보의 시기와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영해, 영양, 울진, 안동을 축으로 하는 세거지의 분포는 보첩의 편찬 주체와 지역 사회의 결합 양상을 보여 준다.
셋째, 주제성의 측면이다. 자녀안차(子女按次)에서 선남후녀(先男後女)로의 전환과 외손(外孫)·사위의 수록 범위 축소는 조선 사회의 가족 및 상속 제도 변화가 기록 양식(樣式)에 반영된 결과이며, 보첩은 계보 기록인 동시에 가족 제도사(制度史)의 자료이기도 하다.
넷째, 계승과 보존의 측면이다. 앞서 밝힌 디지털 족보 사업은 구보(舊譜) 원본의 물리적 보존과 디지털 사본의 무결성(無缺性)·연속성(連續性) 확보를 병행하며, 2027년 상설 기구로의 이관을 통하여 일회적 사업이 아닌 영구 관리 체계로 전환된다. 300여 년간 수보(修譜)를 이어 온 방식이 그 매체를 달리하여 계속되는 것으로, 기록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함께 도모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2026년 10월 2일
영양남씨 세보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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